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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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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박산하┃KTX매거진 에디터 2011년 11월 357호

가을 초입, 통영에 있는 작은 섬에 다녀왔습니다. 소매물도, 욕지도, 한산도 등의 섬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드넓은 바다 가운데 비진도를 고른 이유는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지요. 여행잡지 에디터인 저는 많이 알려진 곳보다는 덜 알려진 보물 같은 곳을 찾아다니는 게 의무죠. 제가 맡은 칼럼은 그야말로 발길 닿는 대로 다니는 자유로운 여행이었고요. 비진도로 향하는 길,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두근거림과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머릿속 지도 위 살짝 얹은 두려움이 교차했습니다. 그렇게 작은 섬에 닿았을 때 미리 예약해둔 민박집을 찾았습니다. 대문 앞에서 여유로운 강태공처럼 낚싯줄을 매만지고 있던 아저씨가 바로 민박집 주인장이었습니다. 그는 섬 지도를 펼쳐놓고 꼭 가봐야 할 곳을 동그라미와 화살표를 쳐 가며 나긋나긋 설명해주었어요. 아저씨의 세심한 지도를 따라 단 한명의 학생만이 남아있는 바닷가가 보이는 초등학교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의 저를 떠올리며 해사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어요. 자칫하면 포기하고 싶었던 트레킹 코스 위, 그곳까지 가지 않으면 비진도에 온 의미가 없을 정도로 예쁘다는 풍경을 보기 위해 아저씨의 말에 힘을 얻으며 산을 올랐습니다. 그곳에서 3년은 두고두고 마음에 힘을 얻어 줄 풍경을 만났지요.
누군가의 나침반이 여행의 길 위에서 소중한 지침이 되는 순간이지요. 지난여름 구례에 갔었던 일도 떠오르네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어느 고택 앞을 서성이고 있었는데 주인아저씨가 들어오라며 손짓을 하더라고요. 막 끓인 라면을 우리에게 내어주고, 보여줄 곳이 있다며 고택 뒤로 데려갔습니다. 삐거덕 거리는 낡은 문을 열자 빗물을 머금은 노란 꽃, 원추리가 카펫처럼 펼쳐져 있었어요. 그 순간 이곳이 천국이 아닐까, 몽롱해졌지요. 또 정말 맛있는 국밥집이 있다며 구례 시장을 꼭 들르라고 했죠. 우리는 간판도 없는 그 가게를 찾아 따끈한 국밥 한 그릇에 막걸리 한 사발, 창 밖에 내리는 비까지 더해져 평생 잊지 못할 촌스럽지만 가슴이 따뜻해지는 순간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뿐만이 아니었어요. 남해 바래길을 걸을 때, 저 멀리서 달려오는 하얀 강아지가 우리를 보더니 따라오라며 앞장서 가는 거예요. 자기 동네 곳곳을 소개시켜준 강아지는 약수를 마시고 있는 사이 사라졌어요. 동네를 무척 사랑했던 사람들 중 한분이 환생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지요. 울산 영남알프스에 올랐을 때는 바람이 손짓하는 방향으로 자꾸 올라가다보니 황금빛 억새가 펼쳐져 있었고요.
그렇게 여행은 혼자가 아닌, 사람과 자연이 함께 해줬네요. 저는 그 중에서 사진기자의 동행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느 여행이던 사진기자와 함께 다닙니다. 마음을 쉬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 아니다보니 힘겨운 상황이 되면 서로 까칠해지기도 하죠. 사진기자는 늘 30kg이 넘는 장비를 짊어지고 걸어야 하고, 에디터인 저는 일정과 취재를 신경 써야 하기 때문에 피곤하긴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낯선 여행길 위에서 방황할 때 누군가 곁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힘이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 마음의 끝을 나눌 수 있어 좋고요. 부산 동해남부선을 취재하기 위해 바다가 옆에 펼쳐진 철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혼자였다면 끝도 없이 이어진 철길을 걷기 힘들었을 거예요. 세 시간을 걸었을 때, 다리가 꺾이고 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하더라고요. 함께 했던 사진기자는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던지는 농담 한 마디와 멋진 풍경을 상상 이상으로 카메라에 담아준 열정에 저도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해인사에 갔던 날도 기억이 나요. 장경판전 안에 고요히 숨 쉬고 있는 팔만대장경 취재를 위해 그곳을 찾았던 늦은 여름날이었어요. 종현스님의 배려로 사찰에서 하룻밤 머물게 되었지요. 토독토독 빗소리 외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 밤. 불을 끄고 누우니 마치 우주 속을 부유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고, 금세 까무룩 잠이 들 것 같았어요. 하지만 옆에 있던 사진기자와 저는 동시에 불현듯 ‘물 한 모금 마시고 싶다’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짝 문을 열어보니 비가 오는 하늘엔 별빛마저도 숨어버렸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식당 앞에 수조가 있었던 것이 기억이 났어요. 우리는 무작정 밖으로 나와 망망대해를 걷는 것처럼 몇 발자국을 걸었습니다. 자꾸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아 겁이 났지요. 그때 사진기자가 제 손을 잡았습니다. 서른이 넘고 보니 친한 여자친구의 손을 잡는 것도 어색한데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손을 잡고 발을 맞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찾은 물, 희미한 달빛만 수조 안에 떠 있었어요. 그때 그 물은 참 달콤했습니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는 길도 무섭지 않았고요. 그 사진기자는 제게 언니 같은 존재로 이젠 그 밤을 떠올리며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지요.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으면 두려울 게 없습니다. 저는 요즘 누군가와 헤어져 더없이 쓸쓸한 계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일상의 모든 길을 그와 함께 했는데, 한 순간 혼자가 되어보니 자꾸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되더라고요. 땅이 물렁해진 것도 아니고 가을 햇볕이 그리 강렬한 것도 아닌데 길 위에 있으면 멀미가 납니다. 그래서 일상을 함께 할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고 있습니다. 다시 시집을 꺼냈고, 미술관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평소 연락이 뜸했던 친구들에게 ‘그냥 네가 보고싶어서’라며 스스럼없이 전화도 하고요. 어느 길이든 혼자서는 버거운가 봅니다. 바람 한 점이라도 내게 있으면 마음은 편안해집니다. 두려운 세상을 성큼성큼 걸어갈 용기가 생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