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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건너다 나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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續 선과 그림이야기 - 김현정 2011년 08월 354호

어느 날 동산양개 스님이 길을 가다 강을 건너게 되었다. 자신의 면목을 확인한 스님께서 전하는 게송의 한 대목이다.
절대 다른 사람의 안목을 따르지 말지니, 切忌從他覓
도는 더 이상 너와 함께가 아니리. 迢迢與我疏
이제 나 홀로 가는 길에서, 我今獨自往
어디서나 나는 그를 만난다. (중략) 處處得逢渠
마원(馬遠; 1160/65?~1225?)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동산도강도(洞山渡江圖;동산이 강을 건너다)>는 스님께서 강을 건너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 속에는 낙관落款이나 이름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실은 반드시 그의 작품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선승의 모습을 제외한 개울 주변의 담박한 묘사와 그 뒤로 펼쳐진 안개 속의 나지막한 산의 아련한 실루엣 등은 충분히 마원의 화풍을 반영하는 남송대의 작품으로 여길 만 한 것이다. 마원은 선禪을 수행하는 선사도 아니고, 시인도 아니었다. 다만 도화원에 속한 화원이었다. 하지만 국가공인화가로서 그가 당시 화단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선종화가도 아니고, 선사도 아닌 그의 그림은 산수화가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양개 스님의 고사를 그린 이런 그림이 그려진 것을 보면 남송 말 귀족들의 관심이 불교와 선으로 옮겨 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동산양개 스님이다. 승복을 걷어 부치고 한 손에는 주장자를 힘 있게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장삼자락을 잡고서 개울을 건너고 있다. 그런데, 개울을 건너다 말고는 강물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것이다. 아, 이 그림의 주인공은 양개선사의 눈빛이다. 다른 사람의 안목을 절대 쫒지 말라던 본인의 안목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했는가. 마원의 그림이 그렇듯, 아니 대부분의 남송대의 그림이 그렇듯 표현은 간결하고 나지막한 울림이 있다.
실은 개울에 비친 얼굴을 두고 많은 이야기 거리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을 두고 진아眞我의 그림자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저 그림자의 그림자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본 모습은 어떻든지 강물에 비친 모습은 강물의 물결과 흐름에 따라 그 그림자의 형태를 달리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다면 그것은 다시 참나(진아)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강물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었을 것이며 그럼 비춰 보지도 못했을 것이고, 비춰볼 강물이 없다한들 진아가 원래 없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니…, 양개 스님의 물 위에 슬쩍 비춰 보인 그림자 하나 두고 참 많은 생각과 이야기 거리가 오고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한 번 위의 게송을 음미해 보자. “다른 사람의 안목을 따라 가지 말지니, 그러면 도는 너와 함께 있지 않으리.” 이것이 첫 구절이다. 다음 구절을 읽어보면, “이제 나 홀로 가는 길에서, 어디서나 나를 만난다.” 홀로 가던 길목 어느 강물 위에서 동산 화상은 자신과 마주쳤다. 누가 이야기 해주는 내가 아니라, 남의 안목으로 보는 내가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여기에는 거짓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장점과 단점, 자신의 모습은 스스로가 제일 잘 안다. 하지만 문제는 안타깝게도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데 있다. 그래서 자꾸 남에게 나에 대한 것을 묻게 된다. 하지만 모든 문제의 해결점은 자신의 제일 괴로운 부분까지도 있는 그대로 스스로에게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것을 어느 글에서 보니 자존감이라고 표현했다. 자신의 정확한 평가와 그에 대한 극복의 과정이 그야말로 자신이 성품을 본다는 견성見性의 출발이 아니겠냐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나의 빈약한 소견으로도 과감하게 말하고 싶다. 잠시 숨을 고르고 생각해 보니 그림 하나를 두고 너무 호들갑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