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겨우리만치 내리는 비. 어제 그리고 오늘…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있다. 이리 비 오는 동안 퇴설당堆雪堂 곳곳에서는 잡초雜草들의 아우성이 들린다. ‘나 좋아라’고. 그들이 환희歡喜하며 마당 여기저기 짙푸른 무더기로 장엄莊嚴하는 동안 내 마음은 마냥 아득해진다.
2008년 대한민국 기상청은 “과거와 달리 여름철 장마발생과 소멸시기가 뚜렷하지 않아 2009년부터 장마 예보는 폐지하고 여름이 시작되면 ‘우기雨期’로 명명한다”고 공표했다고 한다. 최근에 접한 뉴스기사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인한 한반도 기후변화를 반영하기 위한 것이란다. 집중적으로 비가 내리던 뚜렷한 온대의 여름철 장마기후에서 넓은 시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비가 내리는 열대 혹은 아열대성 우기로 바뀐 것이다. 아무리 무상無常한 세상사世上事라 하나 이러한 자연기후변화에도 민감하게 걱정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답답하다.
그러나저러나 지난 늦은 봄. 앞과 중간 그리고 뒷마당에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잡초들은 나의 손을, 특히 왼손의 엄지검지 손톱과 지문을 흙빛으로 물들이고 까칠하게 만들고 있다. 내 손을 감싸던 장갑은 벗어버린 지 오래.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냥 장갑이 끼기 싫어졌다.
뒤돌아서면 어느새 또 자라있는 징글징글한 풀들과 만나는 시간은 햇님이 님 그리다 서방으로 넘어가려 하는 그나마 선선해진 오후. 수업 없는 오전이라면 햇빛이 나의 까끌한 머리를 쪼아대기 전 까지다. 잡초의 밑 둥을 움켜쥐고 ‘쬭, 쬭’ 찰나의 순간 뽑아낸다. 그렇게 한 두 시간 정도 쭈그리고 앉아 오리걸음으로 이쪽저쪽 다니다보면 원만한 혈액순환에 장애가 있는 듯 허리가 쑤신다. 해서 사이사이 숨 돌리려 잠시 일어날라치면 시골영감님허리처럼 구부정해진 채 옳게 펴지지 않아 한참을 추스르곤 한다.
그 와중에 주위를 둘러보면 아직 손대지 않은 마당과 사뭇 다른 모습을 보면 왠지 모를 개운함이랄까, 속이 다 청량淸凉해 짐을 느낀다. 이쯤에서 번뇌煩惱와 보리菩提가 둘이 아님을 조금이나마 맛본다 하면 지나치다 하실런지? 왜?
잡초들로 뒤엉키기 전 마당은 ‘여여如如한 본각本覺 그 자리’, 여름과 함께 잡초들이 우거지기 시작하는 것은 ‘무명無明의 발동發動’, 매일 잡초를 뽑는 것은 처음 자리 그 모습을 향한 ‘이미 일어난 ‘번뇌煩惱를 조복調伏하려는 발버둥’ 이라는 생각은 또 어떠한가?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가운데 ‘진여훈습眞如熏習’이 언급言及되는 대목과 접목시켜 생각해 보았다.
훈습熏習이란 무엇인가? 자구字句적인 해석解釋만으로 살펴본다면 흑熏 자字는 ‘연기에 그을리다, 향 피우다, 스며들다’라는 뜻이 있다. 그렇게 익혀진다는 것이다. ‘연기에 그을리면 새카매지듯, 향 피우면 향 내음이 스미듯’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진여훈습眞如熏習이란 ‘진여眞如로 훈습熏習이 된다’, ‘진여眞如의 영향을 받는다’라는 뜻이 된다. 그 내용을 본문本文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眞如熏習義有二種진여훈습의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一者自體相熏習일자자체상훈습. 二者用熏習이자용훈습. 自體相熏習者자체상훈습자. 從無始世來具無漏法종무시세래구무루법. 備有不思議業비유불사의업. 作境界之性작경계지성. 依此二義恒常熏習의차이의항상훈습. 以有力故能令衆生厭生死苦이유력고능령중생염생사고 樂求涅槃악구열반. 自信己身有眞如法發心修行자신기신유진여법발심수행.
진여훈습의 뜻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어떻게 둘이 되는가. 하나는 본디 체상으로 훈습됨이요, 둘은 용으로 훈습됨이다. 본디 체상으로 훈습된다는 것은, 시작도 없는 때로부터 오면서 무루법을 갖추고, 부사의한 업(진여의 작용)을 갖추고 있으면서 경계의 성품을 짓는 것이니 이러한 두 가지 뜻에 의지하여 항상 훈습되는 것이다. (이러한)힘이 있는 까닭으로 중생이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여 자기의 몸에 진여법이 있는 줄 저절로 믿고 발심하여 수행케 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중생衆生(나)이 생사生死의 괴로움(무명無明이 발동發動한 듯 심란한 마당)을 싫어하고 열반涅槃을 구求해(보기 좋았던 마당의 모습) 자신自身의 몸에 진여법眞如法이 있는 줄 저절로 믿고 발심發心하여 수행修行케 하는 것(잡초제거)’이라는 내용內容이, 매일 잡초를 뽑으며 번뇌煩惱와 보리菩提가 둘이 아님을 조금이나마 맛본다고 한 나의 뜻과 통通한다 본다. 어차피 번뇌煩惱를 통通해 보리菩提를 얻는다하면, ‘번뇌煩惱를 떠난 보리菩提’나 ‘보리菩提를 떠난 번뇌煩惱’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잡초가 있지 않고서야 잡초를 없앤 뒤 그 시원함을 어찌 느낄 것이며, 잡초를 없앤 뒤 그 시원함이란 잡초를 없애고서야 느낄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이는 점교漸敎에서 말하는 성불과정成佛過程과도 비교해 볼 수 있겠다. 점교漸敎에서는 삼아라한三阿僧祗 일만겁一萬劫을 닦아야 성불成佛할 수 있다 가르친다. 오십오위五十五位 가운데 십신十信을 일만겁一萬劫 닦고, 삼현三賢을 일아승지一阿僧祗, 초지初地부터 육지六地까지 일아승지一阿僧祗, 칠지七地부터 십지十地까지 일아승지一阿僧祗를 닦는 것이다. 잡초를 뽑아 가는 일 또한 이와 같으리라. 조바심 없이 하루하루 시간 내어 조금씩 뽑아 나가다 보면 퇴설당 경내境內가 어느덧 훤해지니 말이다. 허나 그도 잠시. 방심放心하여 게을러지기라도 하면 자연自然의 힘에 허무虛無해 지는 나와 맞닥뜨릴 수 있다. 수행修行 또한 이와 같은 것. 불퇴전不退轉의 굳은 신심信心으로 무던하고 질박質朴하게 꾸준히 해 나가다 보면 좋은 날이 있으리라는 것이다.
마당정리울력에는 행자님이 함께 한다. 허나 옥玉의 티랄까? 여러 모로 부족함 없는 지금의 행자님에게서 잡초를 정리해 나감에 있어 뭔가 부족함을 느낀다. 내 욕심이 과過한 걸까? 뿌리 채 뽑는 것이라든지, 울력 후 작업범위와 그 속도를 두고 보면 몇 % 부족한 감을 떨쳐버리기 쉽지 않으니… 다만, 한 가지 옛 기억으로 스스로 달랠 뿐, 나도 저 나이 때는 그러했다는 것.
여름방학, 시골에 가면 어른들께서 잡초를 함께 뽑자고 그리 성화셨다. 심지어 비 온 뒤 축축한 날씨임에도 질펀한 흙 밭에서 우울하게 잡초를 뽑았던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때는 풀 뽑는 일을 왜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또 자랄 건데 힘들게 말이여… 지금 와 생각해 보니 힘들고 덥고 짜증났던 때문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이러한 울력이 싫지만은 않다.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이 무리 가기는 하지만, ‘쪽, 쪽’ 뿌리 채 뽑히는 그 소리에 내 마음 속 번뇌煩惱가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또, 말끔해진 땅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마음으로 나도 몰래 미소 짓는 그 개운함에 무척 상쾌하기도 하다. ‘그 당시 어른들도 지금의 나처럼 생각하시지 않았을까’라는 억측도 해 본다.
아무튼 하루 온 종일 내리는 비에 잡초와 씨름할 시간이 나지 않아 편하기는 하지만, 비 그친 뒤 훌쩍 자라있을 잡초를 생각하니 시름만 쌓인다. 김매다 호미와 돌이 부딪히는 소리에 깨달았다는 선사禪師도 계시다는데, 풀 뽑히는 ‘쬭’소리에 나또한 깨달음을… 하는 바람 겸 망상妄想을 피우며, 창밖 빗소리에 그 시름 달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