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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라장 주련과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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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이야기 - 성안┃팔만대장경 보존국장 2011년 08월 354호

사십년설하증법四十年說何曾法 육천권경독차방六千卷經獨此方
부처님께서 사십년 동안 설하신 말씀은 일찌기 무슨 법문이었을까,
육천권이나 되는 경전이 홀로 여기에 계시네.
이것은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바른 깨달음을 이루신후 사십년간 설하신 말씀들이 팔만대장경판으로 판각후 인경을 하여보니 6,791권의 책으로 이루어진 것을 의미 하며, 이 책에는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바른 해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주련은 수다라장의 편액을 쓴 위당 신관호(威堂 申觀浩 ; 1810~1888)의 작품이다. 수다라장의 종모양의 문을 통과하면 이층에 팔만경각八萬經閣이라는 편액을 볼수 있다. 편액 위에는 6,791권의 인경 제본한 대장경 전질이 봉안되어 있어, 그 밑으로 한번만 통과하더라도 팔만대장경 전질을 일시에 머리에 이는 공덕을 얻는다고 한다. 편액의 글씨는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 1770~1847)의 작품이다. 자는 윤원允遠, 호는 창암蒼岩, 초명은 규환(奎奐 또는 奎煥)이었으나, 만학晩學등 세가지가 늦었다는 뜻으로 삼만三晩이라 개명하였으며, 이 이름은 집이 가난하여 공부하기에 늦었고, 벗을 사귀는 것이 늦었고, 장가를 늦게 들어 자손이 늦었으니 이 세 가지가 늦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창암은 글씨쓰기에 몰두하여 벼루를 세개나 구멍을 내었다고 하며, 병중에 누워 있을지라도 하루에 천글자를 썼으며 글씨를 배우러 오는 이가 있으면 한점 한 획 쓰는 법을 가르치는 데 심혈을 쏟아 한 달이나 걸렸다 한다. 창암이 어느 날 정읍의 어느 한약방에 들러 놀고 있는데 약방주인이 대구약령大邱藥令으로 가는 약명藥名을 좀 써 달라고 했다. 한가한 틈이라서 이삼만은 약방주인이 부르는 대로 약의 이름을 많이 써 주었다. 이 약명 즉 물목기物目記는 대구에 도착하여 중국의 약장사 즉 화상華商의 손에 들어갔다. 화상이 물목기의 글씨를 보니까 특이했다. 참으로 잘 쓴 글씨였다. 화상은 감탄하여 대구의 거래 약방에게 이 물목기의 글씨가 누구의 글씨냐고 물어오자 이삼만의 글씨임을 알려 주었다. 그 후 몇 달이 지나서 화상 하나가 이삼만을 찾아왔다. 얼굴에 맑은 정기가 감도는 화상이었다. 찾아온 내력을 물으니 이삼만 선생한테 글씨를 받으러 왔다하며 공손히 예를 하는 것이었다. 이삼만은 사양하지 않고 반가이 대접했다. 글씨를 중국사람이 받으러 왔다는 것은 그에겐 영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삼만은 붓을 들어 석상휘호席上揮毫, 일필휘지一筆揮之했다. 화상은 이 명필의 글씨를 받아들고 사례했으며 즉시 돌아갔다. 이런 소문이 주위에 많이 퍼지자 이삼만은 글씨가 명필이라는 소문이 퍼져갔다. 그뒤 그는 문자 그대로 명필의 이름을 지킬 수 있었다. 19세기 호남서단에서 활동했던 창암은 서울에서 활동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평양에서 활동한 눌인 조광진(訥人 曺匡振 1772~1840)과 함께 당대의 ‘삼필三筆’로 불렸던 인물이다. 추사가 건축적인 예서禮書에서 일가를 이뤘다면, 창암은 행초서行草書를 발전시켜 물처럼 바람처럼 흐르는 듯한 ‘유수체流水體’로 필명을 떨쳤다. 창암은 모필毛筆과 함께 남들이 쓰지 않는 갈필(葛筆 ;칡뿌리), 죽필(竹筆), 앵우필(鶯羽筆 ;꾀꼬리털) 같은 특이한 도구로 글씨를 쓴 사례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