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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과자 :“별까지는 걸어서 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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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어 - 정인경┃철학박사 2011년 08월 354호

좌절하기: 모순을 선택해야 인간이다.

당신은 행운의 과자를 먹어 본 적이 있나요? 만두처럼 생긴, 속으로는 행운의 쪽지를 넣어 튀긴 과자를 깨어 본 적이 있어요? 사람들은 행운의 말을 감쌌던 과자를 먹기도 하고 안 먹기도 하는데 나는 꼭 먹어요. 먹을 수 있는 것을 그냥 버리는 게 아까워서…. 하지만 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먹지 않아요. 그 속의 행운만을 가질 뿐이지요. 당신은요? 당신이 과자를 먹는 사람이라면 당신의 격식 없는 서글서글함을 좋아할 거예요. 당신이 과자를 먹지 않는다면 당신의 세련된 매너를 좋게 생각하겠지요. 그러니 상관없어요, 먹던 안 먹던.

행운의 과자에서 당신은 어떤 행운을 가졌어요? 나는요, 여러 행운을 과자 속에서 꺼내어 보고 웃고 잊었지만, 며칠 전 이 행운의 말만은 평생 간직할 것 같아요: “별까지는 걸어서 갈 수 없다.”
이 행운의 글을 읽는 순간, 아름다운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걸어서 갈수 없다면 어떻게 가지?’를 생각했지요. 함께 글을 읽은 친구들은 “별은 허황된 꿈이다.”, “지나친 이상주의를 삼가라.”, “불가능한 꿈을 갖지 말라”라고 해석을 했어요. 친구들의 해석이 정답이었지만 나는 내 오답을 포기할 수가 없었어요. 당신 해석은 어떤가요?

많은 것을 나는 욕망해요. 나는 매일 소망하지요. 어떤 철학자는요, 본질적인 소망은 욕망과는 다르다고 이야기해요. 욕망은 그때마다 요구되는 것을 자기만을 위해 구하지만, 자기만을 위해 구하는 욕망은 알맞은 것이 아니라고 해요. 반대로 본질적인 소망은 타인과 함께 요구할 수 있는 알맞은 것에 대한 희구라고 하지요.
만일 내가 별까지 걸어가는 것을 꿈꾼다면, 전적으로 이기적인 것이 아니니 소망인가요? 사실 내가 실제로가 아니라, 내 마음과 내 삶에서 별에 가는 것이니 타인에게 얼마나 소용이 될까요? 그렇다면 욕망인가요? 그 철학자의 구별에 따르면 “별에 가고 싶다”는 것은 욕망도 아니고, 소망도 아닌 셈이죠. 쓸데없는 것이죠.

나도 알아요. 걸어서 하늘까지 인간이 어떻게 가겠어요? 하지만 별을 꿈꾸는 것, 참 아름답지 않아요? 더구나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에서 별을 향해 걷는다는 것, 심지어 위대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아름다운 모든 것들은 사실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 같지 않아요. 아름다움은 인간 안에 있는 신적인 것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인간은 신은 아니에요, 하지만 아름다움의 인간은 신적인 것일 수는 있어요. “아름다움은 힘들다”라는 옛말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조건이 얼마나 혹독하고, 그 만큼 위대한 것인지를 말해줘요. “별까지 걸어서 간다.”는 것은 유한한 존재이면서도 무한을 현실의 삶 속에 끌어들이려고 하고, 시간의 흐름 속에 살면서도 영원하려고 하는 당신과 나의 이야기인 것 같지 않나요?
그래요, 대립중 하나 만을 선택해서는 아름다울 수 없어요. 모순을 함께 선택할 때에만 아름다울 수 있죠. 모순에서 항상 좌절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아름다워요. 하지만 좌절 그 자체는 위대하지 않나요? 좌절하는 인간은 위대해요.

별까지 걷기: 모순의 길은 근원에 이르는 길이다.

나는 별까지 가지 않으면서, 별로 향하는 길을 걸을 거예요. 어쩌면 이 길은 끝이 없는 항상 움직이는 길일 것 같아요. 어쩌면 늘 시작에 머무르는 길일 것도 같아요. 하지만 ‘갈 수 수 없’는 좌절에 대한 두려움을 유연하게 길 위에 놓는다면, 이 길은 언제나 열려 있을 것 같지 않나요? 사막에서 걷고 있는 사람에게 지평선이, 바다에서 항해하고 있는 사람에게 수평선이 언제 어디서나 다다를 수 있는 끝이듯이, 도달한 순간 그만큼 뒤로 내빼는 열려진 길일 것 같아요.
별이 흐르는 가장 높은 하늘에 이르는 길은 별이 비치는 강이 흐르는 가장 낮은 땅의 길을 선렵하도록 할 것 같아요.
수직의 길과 수평의 길이 얼마만큼 차이가 나는 길일까요? 이 길은 끝이 없는 심연과도 같은 차이를 숨기고 있는 길인 것 같아요.

어떤 이는 세상이 끝이 있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세상이 끝이 없다고도 하지요. 세상이 끝이 없던 끝이 있든 간에 나는 상관없어요. 나는요, 어느 땐 이런 느낌을 가져요. 인생은 심연에 대한 공포 때문에 외마디를 지르며 계속 무시무시한 속도로 추락하는 것 같아요. 우리는 심연의 밑바닥에 머리가 박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우리의 삶은 그 심연의 끝까지 추락할 만큼 길지 않다고요. 우리가 수평선 끝에서 예감하듯이 깊은 심연은 계속 연장된다구요. 무시무시한 속도의 추락이 공포이지, 심연에 대한 두려움은 문제되지 않아요.

그래서 무시무시한 속도에 반대해서, 나는 별을 향해 아주 천천히 움직일 거예요. 남들이 보았을 때, 게으르다 싶을 정도로요. 낯선 곳에서 친구의 집을 찾아온 방랑자처럼 이 골목 저 골목을 다닐 거고, 번잡한 인파 속으로 들어가 이것저것을 물을 거고, 숲에 접어들면 굳이 피곤하지 않아도 한잠을 늘어지게 잘 거고, 왕성한 식욕을 채우려고 음식을 구할 거예요. 사람들은 내가 그곳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거기에 살지 않아요. 나는 별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죠. 천천히 옮겨 놓는 발자취에는 분주한 발걸음이 담겨있지만, 어느 땐 나조차도 내가 별을 잊고 산다고 생각할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나는 한시도 별을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별까지 떠나는 여행은 끝이 없는 길을 선택해서 떠나는 것이죠. 그 길은 일상의 힘으로는 닿을 수 없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이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노력, 성실, 효율, 성취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어쩌면 아예 무가치한 덕목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 길이 요행의 길이거나 행운이 따라 주어야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에요.
모모에게 시간의 원천을 안내하던 거북 카시오페아는 시간의 근원에 도달하기위해서는 뒷걸음질을 쳐야한다고 알려 주잖아요. 모모는 카시오페아를 따라 뒷걸음질을 쳐서 시간 그 자체에 도착하구요. 역시 거북은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지혜를 가졌어요. 오래 산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존경받을 만하지요.
우리가 행운이다, 또는 우연의 도움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근원에 이르는 길이 그렇게 짧다는 것에 대한 우리의 놀람이지요. 나에게는 ‘방황’이라고 느끼는 카오스적인 행위가, ‘낭비’라고 부르는 비생산적인 흐름이, ‘게으름’이라고 부르는 허황된 꿈이 ‘원천’을 향한 뒷걸음질일 수 있어요.

별에 닿기: 길 안에서 길을 넘어서는 자만이 걸을 수 있다.

별이라는 절망적인 소망을 향해 걷는 것은 세상의 길에서 ‘뒷걸음’으로 걷는 것일 거예요. 아니면 세상의 길을 떠나는 길일지도 모르죠. 이 세상의 모든 길을 걸을 수 있고 달릴 수 있었지만, 당신과 나는 한번은 세상의 바깥쪽으로 달려야 해요. 세상은 우리에게 실격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세상의 바깥에서 길을 간다는 것은 길을 다 걸어내어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것은 아니에요. 나와 길이 분리되어 그 길을 걸어내려고 하는 한, 그래서 목적지에 도착하려고 하는 한, 나는 길을 걷는 자가 될 수 없어요. 그 길을 벗어나려고 한, 나는 진짜 사막에 갇힌 자, 바다에서 헤매는 자가 될 거예요.

나는 길 안에서 길을 넘어서서, 길 밖에서 길을 따라 걸을 거예요.
그래서 별까지 걸어서, 별에 닿을 거예요.
당신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