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포교당 뒤 텃밭에선 채소들이 쑥쑥 올라오고 있었다. 한 달 전, 가야 포교당의 주지로 온 종신 스님이 손수 심으신 씨앗들이 움튼 것이다. 상추, 쑥갓, 치커리, 열무 등등 여러 가지 채소들이 여름 내내 부지런히 자랄 것이다. 그런데 그날 스님이 하신 얘기가 바로 그것이다.
“심전心田에 종자種子를 심어야지요. 그 밭에 심은 씨앗이 자라서 열매를 맺으면 그 씨앗을 다시 이웃에게 전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마음 밭에 씨앗을 심는 일이 지금 불교계에서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스님은 말씀하신다. 현재 한국 불교는 참선과 염불과 주력을 통해 마음 밭은 많이 갈아놓았단다. 잡초와도 같은 번뇌를 뽑아내고 땅을 일구고 거름까지 뿌려놓았으니 마음의 평안을 얻어 더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 밭을 갈기만 해선 안 된다는 게 스님의 말씀이다. 씨앗, 즉 부처님 말씀을 그 마음 밭에 심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부를 통해 씨앗을 심고 잘 가꾸어 자기 것으로 만들고 그것의 결실이 맺어졌을 때 그 씨앗을 다시 이웃에게 전해야 불교가 발전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박제화 된 팔만대장경을 깨워 그 말씀을 마음 밭에 심어야지요.”
현재 팔만대장경은 역사적인 관점, 피상적인 문화재의 가치로만 다루어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니 스님은 그것이야말로 박제화 된 팔만대장경이 아니냐는 말씀이다. 팔만대장경 속에 담겨져 있는 내용과 혼은 거의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팔만대장경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도 그게 무슨 내용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렇게 천년이 흘러왔어요. 이젠 팔만대장경의 내용 속에서 진수를 뽑아내어 사회 곳곳에 직접 전달되어야 합니다. 왜곡되고 굴절된 사회의 모순들을 용해할 수 있는 불교적 대의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외형적인 가치를 얘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내용적 가치를 발굴해 사회에 돌려 주어 야 한다. 팔만대장경을 어린이, 청소년, 청년, 장년, 노년에 맞게, 그리고 칠학 법계에 맞춰 세분화하고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상세하고 친절하게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종신 스님은 이 작업이 불교의 미래를 백년은 앞당길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우리 신도들은 말문이 막혀 있어요. 평생을 절에 다녀도 논리적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으니 그 어떤 말도 가정과 이웃에 전파할 수가 없지요. 난 남은 생애는 신도들의 말문을 틔워 주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을 평생의 원력으로 세웠습니다.”
종신 스님은 일차적으로 교육철학과 교육공학을 불교에 도입할 생각이다. 그저 지금까지 두루뭉술하게 해왔던 법문이나 강의가 아닌 체계적인 교육방법을 마련하겠다는 말씀이다. 세속의 언어가 진화되고 다양화되고 있는 만큼 불교에서 사용되는 언어도 많이 진화되어야 할 거라 말씀하신다. 스님들만 알아듣는 옛 말은 집안잔치 일뿐, 지금 사람들의 마음은커녕 귀에도 채 가닿지 않기 때문이다.
“스님들끼리만 좋은 얘기라며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건 세속과 결별한 언어입니다. 세속의 언어에 불교를 얹어서 전해야지요. 그랬을 때 그것이 각자의 마음 밭에 심어지고 신도들의 말문이 트일 수 있습니다. 그래야 그것이 가족과 이웃에게 전파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언어만이 아니라 모든 전반적인 것들, 예를 들어 인문학(문,사,철), 과학(사, 자, 순), 예술, 문화들과의 지식통합을 시도할 생각입니다. 그래야 불교학습에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했을 때 쉽게 다가갈 수 있고 쉽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재 스님이 꾸리고 있는 일들이다.
세속의 사람들이 불교를 그저 피상적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에 대해 스님은 아쉬움을 토로하신다. 불교를 중이 머리 깎고 목탁 치는 것 정도로만 알고 있거나, 절에 가서 기도하면 자식들이 좋다며 친구를 이끄는 정도의 수준의 신도들의 모습이며 한국 불교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쓰는 ‘불교’란 말도 우리가 만든 말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깨닫게 해주는 가르침’이지요. 부처님이 먼저 깨달아서 말씀하셨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모든 학문도 어떤 특권층의 전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사회 모두의 것이며, 인류의 모두를 위한 언어, 학문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이치가 제대로 사회에 번져야 합니다. 팔만대장경도 그리고 어떤 학문도 지식 통합을 일궈내 모든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쓰여 져야 합니다.”
그래서 스님은 7년간 두문분출하고 머물던 충주의 토굴에서 나와 가야산 밑으로 왔다.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 아무도 없고 그저 스님이 머무는 흙집 한 채만 오롯이 있던 곳. 나무를 해서 불을 때고 손수 밥을 끓여먹던 7년이란 세월, 3년간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곳에서 스님은 참 오래도 머물렀다.
“중노릇 20년이 넘으니 이게 아니다 싶었고,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있었어요. 그래서 토굴로 들어갔지요.”
종신 스님은 인간의 유형을 색법, 심법, 공법 세 가지로 나눠 말씀하신다. 색법은 순간적으로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만 판단하는 무리, 심법은 내면의 가치를 사고하고 깊이 생각하는 무리, 공법은 색법과 심법을 겸해서 사고할 줄 아는 무리를 이른다. 스님은 색법으로만 판단하는 것도 심법으로만 판단하는 것도 비불교적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학력의 높고 낮음으로 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높은 지위에 있는 이도 색법에만 치우쳐 판단하기도 한다. 그것을 본 종신 스님은 모든 것을 떠나 토굴로 들어갔다.
“불교적인 대의를 정리를 해야겠다 싶었어요. 이제는 권력, 명예, 정치, 경제 이런 것들에서 떠나서 정말 빈궁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손에 돈 만원 들고 사는 날이 부지기 수였다. 그렇지만 스님은 산에 올라 지게에 나무 한 짐을 가득히 쌓아 짊어지고 내려와 시원한 물 한잔을 마신다. 그 순간엔 천하를 짊어진 것 같은 가난의 또 다른 느낌의 맛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책상에 앉으면 법열法悅이 있으니 괜찮았어요. 우주 법계를 통틀어 활법이 뭐고 사법이 뭔지 꿰뚫어 놓았기 때문에 기쁨을 넘어 대환희가 있었지요”
종신 스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물두 살에 출가했다. 어려서부터 사회적인 정의감이나 의협심이 강했던 스님은 사회의 왜곡되고 굴절된 모습에서 깊고 넓은 마음의 도량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절집이라 생각돼 출가를 결심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서 갔던 절의 향냄새와 목탁 소리가 유난히 좋았던 기억도 있다. 그렇게 해인사로 출가해 행자 생활을 하며 삼천 배를 하고 성철 스님께 화두를 받았다. 그러고는 강원을 다니다가 채 마치지 못하고 선방으로 향했다. 그 후 승가대 소임을 4년간 살며 고대 교육대학원 교육방법전공 석사를 마쳤다. 그 후로는 계속 토굴 생활을 했다. 그리고 지금은 가야 포교당에 앉았다. 토굴 생활이 길었기 때문이기도 할 테지만 스님의 성품답게 단출한 삶이다.
“가야 포교당이 현재 많이 침체돼 있어요. 건물은 이층으로 새로 지은 집이지만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으로 활성화 되지 못하고 있어요. 불교대학 운영부터 시작해서 이 지역 포교도 활성화 시켜볼 생각입니다. 해인사가 있는 가야의 포교당이니 우리 승가의 자존의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10월부터 시작될 불교대학 첫 번째 내용을 잠시 이야기 하신다. 급박하고 복잡다단한 현실 속에서 늘 불안한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지침, “자존감(자아 존중감)”을 갖으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태어나시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 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하셨습니다. 우린 모두 깨달을 수 있는 불성이 있어요. 우주를 통틀어 나만큼 소중한 게 없다는 의미지요. 부처님이 돌아가시면서는 ‘자등명법등명 自燈明法燈明’이라 하셨어요.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라는 말씀이지요. 이 두 말속에는 자아와 자존이 들어 있지요”
부처님 말씀에 내 불안했던 눈동자가 순간 확장되고 쳐진 어깨는 바짝 올라붙는다. 내 흐릿했던 눈동자를 알아보신 종신 스님이 해주신 그날의 마지막 말씀이셨다. 그러고 보니 종신 스님이 말씀하시길 포교당은 언제든 찾아갈 수 있고 손닿을 수 있는 곳이라 했다. 그러니 스님은 마치 언제든 찾아가면 약을 꺼내주는 동네 약방의 약사와도 같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박제화 된 팔만대장경이 아닌 우리의 삶과 마음에 씨앗이 되는 팔만대장경일 것이다. 그것이 스님이 말씀하시는 우리의 삶에 깊숙하게 들어오는 부처님의 말씀, 우주 법계의 이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