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납자가 동산洞山 선사에게 물었습니다.
여하시사문행如何是沙門行이닛고
어떤 것이 수행자다운 행동입니까?
두장삼척頭長三尺이요 경단이촌頸短二寸이니라
머리 길이는 석 자요 목 길이는 두 치니라.
《아함경》에는 사문이 마땅히 해야할 행동에 대하여 ‘탐진치 삼독을 끊고 일체번뇌를 영원히 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대승의 논서인 《유가사지론》에서 사문이 자기를 제대로 장엄하려면 ‘바른 믿음과 거짓 없음을 갖추어야 하며, 삿된 소견을 버리고 정진하는 지혜를 갖추어야 하며, 소욕少欲과 희족喜足으로 살아야 하며,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양생養生과 쉽게 만족할 줄 아는 법을 배워야 하며, 두타행의 덕德과 단엄한 모습을 유지하고, 음식의 양을 잘 알아서 먹을 것이며, 선한 사람의 행실을 해야 하고,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의 상相을 갖추어야 하며, 인욕과 부드러움과 함께 선량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줄여서 안으로는 내 마음공부를 챙기고 밖으로는 자비심을 갖추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종문宗門의 선사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문행沙門行을 강조 했습니다.
수노水老선사는‘사문행’을 묻는 학인에게 ‘동즉영현動則影現이요 각즉빙생覺則冰生이다’라고 대답한 바 있습니다. 생각이 조금이라도 움직이게 되면 그림자 즉 헛된 것이 나타나고, 지각을 일으키면 얼음처럼 그 생각이 굳어진다는 말씀입니다. 행동거지는 말할 것도 없지만 생각단속도 더욱 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른 것을 고인들은 ‘실행이 없지도 않으면서 또 한가한 틈이 없지도 않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이를 다시 부연해서 설명하자면 비록 한가한 틈이 있지만 항상 틈이 없는 것과 같고, 비록 실행이 있지만 항상 실행이 없는 경지가 나타난 상태라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금시에 범부와 성인의 인과因果와 공행功行까지 남김없이 없애버린다면 비로소 본래자리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를 가르켜서 선지식들은 ‘독립저인獨立底人’ 즉 ‘홀로 선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다른 말로 ‘사문’이라고도 했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끊어진 본분사本分事에 부합해야만 비로소 안팎으로 분별이 다하고 삼세三世의 일이 모두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더 이상 어떠한 번뇌라도 없어질 것이니, 이를 ‘부처의 본분사’라고 했고, 또‘대도를 모조리 성취한 사문’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설사 그런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사문이라는 자리를 고수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 또한 한 켠에 집착하는 일이 되는 까닭입니다. 설사 이류異類속에 떨어져, 뿔을 달고 가죽을 둘러쓰고 있는 짐승의 몸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 ‘본분사’를 활발하게 전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수행자가 깨달음을 성취한 후, 만족감으로 그 자리에 계속 안주安住하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을 다시한번 강조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 자리에 절대로 머물지말고, 혹여 주변에 미혹된 자가 눈꼽만큼이라도 있다면 반드시 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소매를 걷어붙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다시 번뇌의 경계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선문禪門에서는 ‘사문이류沙門異類’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보살정신을 조사선의 방식으로 나타낸 ‘이류중행異類中行’ 인 것입니다. 그래서 남전스님은 열반하면서 ‘아랫동네의 수고우水牯牛로 태어나겠다’는 말씀을 남겼습니다. 이 말씀은 이류異類 안에서 본분사를 펼치겠다는 원력을 후학들에게 방편으로 내보이신 것입니다. 어떤 이류異類의 존재로 태어나더라도 걸림없이 본분사를 펼치는 사문의 진실한 실천행을 강조한 가르침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된다고 할지라도 자유자재로 이류중행異類中行을 실천하는 것이 조사선祖師禪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굉지정각 선사 회상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원의 토지수입과 세입을 관리하는 소임자가 허물을 저질렀는지라 할 수 없이 내보낸 후 선사께서 법상에 올라가 대중들에게 말했습니다.
“지장地藏 스님은 경작으로만 살아갈 계책을 삼았습니다. 하지만 남전선사는 수행으로 살아갈 계책을 세웠습니다. 낫으로 추수하면서도 일상에 품은 생각이 평온하며 쉬어버린다면 저절로 알곡이 맺히는 도리를 알았던 까닭입니다. 이렇게 되면 남기거나 버릴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범부들의 입장에선 남기거나 버릴 것이 없는 경지를 성취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더욱 열심히 정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밭농사 못지않게 심전心田 즉 마음밭 농사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고구정녕하게 강조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납자에게 밭농사란 생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심전을 가꾸기 위한 방편일 뿐 입니다.
이제 반살림을 마무리하는 하안거 결제대중들은 공부에 대한 산승의 기대치를 저버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산승 역시 결제대중들의 기대를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중과 주인은 평등한 것이 총림의 살림살이입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의자의 다리 4개가 곧게 땅바닥에 붙은 듯이 산중이 안정될 것입니다. 여름태풍이 불어도 나뭇가지가 고요할 것이고 장맛비가 내려도 흙덩이가 부서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총림에서 충분히 수행한 납자의 면모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잘 자랐고 제대로 길들여진 수고우水牯牛 즉 물소인 것입니다. 사문의 몸으로 수고우가 되는 것입니다. 결제하여 수행이 무르익는 것이 알고보면 ‘사문의 이류행異類行’인 것입니다. 이 도리가 범부에서 이류異類인 성인이 되는 도리입니다.
그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선 동산洞山 선사께서 말씀하신‘사문행이란 머리 길이는 석 자,목 길이는 두 치’라고 하신 그 법문의 낙처落處까지도 잘 참구해야 할 것입니다. 남은 반 철 동안 온몸을 던져서 진정한 사문답게, 참 수행자답게 더욱 용맹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득력得力하면 상대방의 근기에 따라 자유자재로 몸을 바꾸어 운신할 수 있는 사문전신沙門轉身의 경지까지 증득하시기 바랍니다.
백겁귀부득百劫歸不得인들
하망내시도何忘來時道리까
백겁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한들
어찌 와야 할 길까지 잃어버리겠는가.
2555(2011) 신묘년 하안거 반산림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