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것이 나의 거울이고, 나의 스승인 것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깨닫게 된다. 그래서인가,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들께서는 처처處處에 불성佛性이 아닌 것이 없다고 일찍이 가르침을 주셨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이 세상에 펼쳐진 만상이 공간을 이동하며 시간을 낚고 있는 것이었다. 불성은 있는 그대로 불성이 아니라 다만 불성은 불성으로써 나를 깨우치게 해야 그것이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로부터 모름지기 수행자는 부처에서도 떠나고, 조사祖師에게서도 떠나 있으므로 더욱이 그 전해지는 말에서도 떠나 있지만, 실제로 하늘과 땅 사이에 부처로 삼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 우주의 모든 것이 말 없는 말이요, 가르침 없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복잡스럽게 뭐가 다단한 마음이 들 때 염두에 둘만한 분이 조동종(曹洞宗;중국의 오가칠종 중 선종의 한 종파)을 연 동산양개 스님이다. 이 분의 호가 동산洞山이고, 법명은 양개良价이다. 육조 혜능 선사 이후 남종선南宗禪이 결국 선풍의 대표선수로 나서던 중국 당나라 시기 다시 남종선은 조동종과 임제종로 갈려 가장 큰 두 흐름을 좌우하고 있었다. 종파가 많이 생겼다는 것은 선풍의 유행으로 선종의 교세가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조동종의 개산조인 동산양개(洞山良价;807~869) 스님의 스승은 운암담성(雲巖曇成;782~841) 선사였다.
양개 스님이 활동하던 9세기 중반은 중국불교의 참담한 시기였다. 중국 역사를 통해서 여러 차례의 폐불(불교를 탄압하여 폐한 사건, 총 4번의 폐불이 있었고, 이를 삼무일종三武一宗이라고 한다.) 사건이 있었지만 당나라 무종(武宗; 840~846재위) 때 있었던 회창(會昌; 845~847)년간의 사건은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스님들이 환속되었고, 사원은 파괴되었으며, 전적들은 사라져버렸다. 이때까지 크게 번성하던 교단의 많은 종파들이 쇠퇴하였으나 유독 선종만은 예외였다. 그 이유를 《중국 선의 역사》를 쓴 이부키 아츠시는 이러게 전한다. 사상적 혹은 수행의 면으로 보자면 선은 전적(典籍, 경, 논 소 등)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적들이 폐간된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고,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남평왕 종전(南平王 鐘傳)과 같은 이들은 오히려 양개 스님의 교단을 보호했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관료와 지방의 절도사등과 같은 신흥 계급들에게 선종이 쉽게 수용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경제적인 면으로도 선종은 이미 사원 내에서 자급자족을 하는 전통이 자리 잡았기 때문에 선과 생활이 일치 되어 폐불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 있었다.
폐불의 소용돌이 안에서 오히려 많은 제자들을 키워내고 훗날 조동종의 시조가 되었던 동산 양개 스님의 역량이 다시 보이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양개 스님의 스승이었던 운암 선사와 관련된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 스님이 운암 선사에게 “관세음보살의 천개의 눈 중에 어느 것이 바른 눈입니까?”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스님께서는 여기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한다. “등불이 없을 때 더듬어서 목침을 찾았다면 어떻게 찾은 것이오?”
운암 선사는 아마도 빗대어서 대답하거나 혹은 좀 냉소적으로 답하시는 것이 습관이었던 듯 싶다. 이는 제자와의 문답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