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 또 정진하지만 절집 안에도 사바의 그림자가 드리우기는 마찬가지다. 주지 자리를 놓고 일어나는 다툼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는다. 15년 전쯤이다. 계룡산 신원사에 주석하고 계신 벽암 스님에게 한 불자가 물었다. “어째서 수행하는 스님들이 자리다툼을 합니까?” 불자들은 물론 많은 국민들이 품고 있었던 의문이다. 90년대 내내 종단이 소동을 벌였던 것을 떠올리며 물었던 것이다. 벽암 스님이 대답했다. “스님들도 사바세계에 살고 있지요. 사바세계란 늘 혼돈이지요. 그래서 수행하는 것이고요.”
최초의 주지는 석가모니부처님이라고 한다. 2500년 전과 지금의 주지 소임에 다른 점이 많다. 그렇지만 대중을 이끄는 중심이 주지라는 점은 다르지 않은데, 원철 스님이 펴낸 《부처님은 주지를 하셨을까?》라는 책을 보면 그 연유가 이렇다.
당시 수행자들은 ‘집 없는 사람’이다. 나무 아래에서 머무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지붕이 있는 것에서는 잠을 자지 않았다. 그것도 집착이 생긴다고 한 나무 아래에서 사흘 이상을 머물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집 없는 사람’들은 늘 돌아다녔다. 그러자 부처님 제자들은 자비심이 없어 초목, 개구리, 지렁이 등을 상하게 하고 밟아 죽인다는 비난 여론이 일었다. 신심 있는 불자들이 일정한 처소를 제공하겠다고 나섰고, 큰 논란이 일었고 부처님은 우기 3개월 동안 지낼 처소를 받아들였다. 최초의 사찰은 이렇게 창건됐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승단의 어른으로서 수행을 지도하고 생활을 이끌었다. 당시 사찰이 지금처럼 기와 올린 으리으리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기둥 세우고 풀을 엮어 지붕을 얹은 정도였다.
부처님이 사찰을 창건한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감각기관(眼耳鼻舌身意)을 제어할 수 있는 자에게는 삼림이건 지붕이 있는 집이건 다를 바가 없다. 세계의 어느 곳이든 선정을 위한 장소인 것이다.”(원철 스님의 위 책 10-12쪽)
주지는 애초 산중의 가장 큰 어른이었다. 방장方丈으로 불렸다. 방장스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상주대중들의 수행과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뒷받침하는 소임을 맡은 이가 주지였다. 지금도 이런 생각을 가진 스님들이 계시다. 한 총림의 스님은 주지 다툼을 아쉬워하면서 “방장스님이 산중의 주지인데, 행정편의상 주지를 임명하여 일을 맡기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과 같이 완전한 사판승이 된 것은 일제하부터였다고 한다. 토지 조사와 등기를 하며 대표자 날인을 필요로 했는데, 이것이 마치 주지 개인에게 주어진 것인 양 잘못 인식되어 권력의 자리가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분석도 일부분만 타당하다. 세상의 흐름에 편승해 원융살림의 전통을 흩트린 일부의 스님, 그리고 이를 바로잡지 못한 더 많은 스님들의 무감각이 빚어냈다고 보아야 한다.
중국에서 선종이 형성되고 여전히 수행의 가풍이 드높았던 시기에도 주지 자리를 놓고 다툼이 벌어졌다. 그러나 지금과는 판이한 모양새다. 특히 산중의 최고어른이 지명하는 방식으로 주지를 임명했다. 총림의 주지를 방장이 추천하는 우리 종단의 규정이 여기에서 연유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다.
백장 선사가 대위산에 제자를 보내기로 했다. 두 후보가 나왔다. 제1좌第一座인 화림 선각 스님과 후원에서 별좌(典座) 소임을 보고 있던 영우 스님이었다. 백장 스님은 시자에게 (뒷물용) 물병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물병을 가리키며 두 스님에게 물었다.
“물병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화림 자네는 뭐라고 부르겠느냐?”
“(똥)막대기라고는 하지 못 할 것입니다.”
이번에는 영우 스님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물병을 발로 차서 거꾸러뜨리고는 바로 나가버렸다. 백장 스님이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제1좌인 화림이 도리어 별좌인 영우에게 졌구나!”
그리하여 백장 스님은 영우 스님을 대위산으로 보냈다.(원철 스님, 22-24쪽)
대위산으로 보내 도량을 일구고 수행자를 이끌 적임자를 뽑는 백장 스님의 거량이 독특하다. 5조 홍인 스님 역시 법통을 이을 스님을 찾으려 게송을 짓게 한 것과 상통한다. 그리하여 법등은 6조 혜능 스님에게 이어지고 면면히 흘러오지 않았던가.
많은 대중을 이끄는 만큼 주지스님은 늘 시련을 안고 산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불감 혜근(1059-1117) 스님이 처음 서주舒州 태평사太平寺 주지를 맡아달라는 청을 받았다. 모시고 있던 오조스님께 하직 인사를 하러 가니 스님께서 당부하였다.
“절의 주지는 네 가지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 세력을 다 부려서는 안 된다. 둘째, 복을 다 누려서는 안 된다. 셋째, 규율을 다 시행해서는 안 된다. 넷째, 좋은 말을 다 해서는 안 된다. 무엇 때문인가? 좋은 말을 다 하면 사람들이 반드시 쉽게 여길 것이다. 규율을 원칙대로 다 시행하면 사람들이 반드시 번거롭게 여길 것이다. 또 복을 다 누리면 반드시 재앙을 불러들이게 된다. 세력을 다 부리면 반드시 시기와 모욕을 당하게 된다.”(원철 스님, 34-35쪽)
차기 주지를 누가 맡느냐를 놓고 통도사가 내홍을 겪었다. 5대 총림의 하나이고, 종정을 지낸 분을 배출한 한국불교의 중심적인 도량인 통도사에서 불협화음이 터져 나온 것이어서 더욱 안타깝다. 이전에도 큰 도량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올해에만도 대여섯 교구본사의 주지를 새로 뽑는다. 산중총회라는 대중공의를 모으는 제도가 있다. 오랜 전통을 이어온 자랑할 만한 제도이다. 그렇다고 불비한 점이 없지 않다. 제도의 모자란 점은 사람들이 메우는 것이다. 지혜로운 집단은 제도를 탓하지 않는다.
주지 다툼은 모두를 패자로 만든다. 다툼의 와중에서 주고받은 격한 언행은 상처를 남겨 스님들 사이를 벌여놓는다. 또 다른 다툼의 빌미로 작용하기 일쑤다. 세력을 만들기 위해 자리를 보장하는 일도 있다. 그러니 해당 사찰을 잘 이끌 스님이 주지소임을 맡기보다는 논공행상에 따라 인사가 이뤄진다. 결국 세상을 제도하기는커녕 뒷걸음질 치기가 반복된다.
승가를 다른 말로 불러 화합중和合衆이라고 한다. 승가에 들면 머리를 깎고 염의를 입는다. 차별이 없다. 그러나 승가에 들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오래도록 지녀온 습성이 사라지지 않는다. 말투가 다르고, 성격이 다르다. 삭발염의 하였지만 생김새도 다르다. 입맛도 어찌 같겠는가. 수행자 집단인 승가에 차별은 없지만, 차이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다름이 어찌 없을 텐가. 다름에서 다툼이 비롯된다. 그래서 다툼은 승가는 물론 사바세상의 일상사다. 일상사이지만 해결은 늘 화합으로 귀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승가는 대중공의와 어른의 권위로써 화합을 이끌었다. 공의와 권위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누가 주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일구어 지켜가야 하며, 복종해야 하는 불문율이다. 아카시아 향기가 짙어지면 여름이 온다. 나무와 풀은 서로 어울어져 더욱 짙푸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