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영문 구절이지만 당시에 힘든 시기였던 나에게는 진하게 여운이 남았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일까? 나는 도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까? 막 30대를 접어 든 청년에게는 고민의 대상이 안 될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아직도 그 때 공연장 벽에서 보았던 그 영문 글귀가 머릿속에 박제되어 해결 될 수 없는 숙제로 남아 있다.
2. 혼란
‘자아(自我)’가 형성되기 전의 나는 정신적 육체적인 성장에 모든 에너지가 집중되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으로 가족의 구성원을 이루고 그 속에서 잘 살면 된다는 원초적인 의식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기가 지나고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으면서 나름대로 처세하는 철학 혹은 가치관을 희미하게나마 가지게 되는 진일보한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벽에 부딪히면서 사람들은 자살을 생각하는 것 같다.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 1위라는 어두운 그림자는 급속한 경제성장이라는 몸통에 붙어 따라다닌다.
궁핍을 벗어나는 원초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한 단계 나아가 가치관과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문제를 맞닥뜨리게 된다. 특히 우리나라는 국가와 사회가 양적인 성장에만 몰두한 나머지 정신적인 차원에서 국민들을 교양하는 시스템이 빈약해져 있는데, 아마 이것도 높은 자살률을 떨어뜨리지 못하는 하나의 원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을 종교별로 분류했을 때 불교신자들의 자살률이 상대적으로 낮게 나온다. 이것은 불교가 가치관과 정체성의 문제에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시도에 나름대로의 길잡이가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라고 여겨진다.
3. 죽음을 초월한 죽음
안중근의사는 31세의 나이에 동양평화론을 주창하였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이 만주지역에 공동평화구역을 만들고 이곳에 3국 공동의 화폐와 공동은행을 만들어 평화롭게 공존을 하면 서구의 제국들이 감히 넘보지 못할 것이라는 게 주요 내용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웃 국가들을 침략하는 제국주의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안중근의사는 조국애와 동양평화사상에 입각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동양의 평화를 깨트린 장본인이자 침략의 우두머리인 이등박문을 처단하기로 작심하였고,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네발의 총탄으로 심판하였다.
안중근의사의 동양평화사상은 궁극적으로는 인간으로 나서 평화롭게 서로 어울려 살자는 진일보한 의식에 대한 호소였던 것이었다. 안중근의사가 죽음을 무릅쓰고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의식을 가진 인간이기 가능한 일이었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누구나 알지만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안중근의사는 그러한 문제를 극복하고서 자신의 죽음을 당당히 받아들였다. 오히려 자신의 죽음 뒤에 오게 될 일을 준비하는 의연함에 대해서는 범접할 수 없는 기운마저 느끼게 만든다. 죽음을 초월한 죽음, 어떻게 하면 그런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
4. 좌표 값
나를 놓고 시간과 공간을 축으로 하여 지도의 좌표처럼 그려보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하나의 선으로 이어 만든 시간 축과 내 몸 속에서부터 시작해 외부 공간, 우주로 이어지는 공간 축으로 말이다.
먼저 시간의 축을 그려보자. 나를 낳아 주신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 쪽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무수히 많은 조상들. 어머니 쪽도 아버지 쪽 조상들과 똑같은 수의 조상들. 그 분들 중 어느 한 분과의 연결만 끊어졌어도 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류가 존재하기 시작한 그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아마도 몇 십 만년은 되지 않을까? 아니 더 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내 후손들도 이처럼 긴 시간동안 또 다른 ‘나’를 통해 존재하지 않을까?
공간의 축을 그려보자. 나는 세상 만물의 형태를 이루는 물질의 최소 단위인 분자가 만든 세포로 만들어졌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분자가 세포 하나를 만들고, 그런 세포 약 100조개 이상이 모여 내 몸의 각 장기와 혈액과 뼈를 구성해 비로소 내가 존재하고 있다.
내 몸 바깥의 공간으로 보자. 내가 살고 있는 지구에서의 나의 존재는 바닷가 백사장의 모래 알갱이 하나 보다도 작은 존재다. 지구가 속해 있는 ‘우리은하’에서의 지구는 또한 바닷가 모래 알갱이 정도이다.
그런데 그렇게 어마어마한 ‘우리은하’조차도 우주 전체에서는 바닷가 모래 알갱이보다도 미미한 존재이다.
이렇듯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의 존재는 너무나도 미미해 존재 자체도 부정할 수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좌표를 그려보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장구한 시간의 축과 내 몸 안의 우주와 내 몸 바깥의 또 다른 우주로 이어지는 공간의 축 그 중심에는 바로 ‘내’가 있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나는 존재하고 있고, 그 자체로 역사성과 우주의 오묘함을 가진 실체이며,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자연(自然)속에서 나서 존재하고 다시 돌아가는 자연의 한 부분인 것이다.
이것이 나를 중심으로 해서 그려본 시간 축과 공간 축의 ‘좌표 값’이다.
무한한 시간 축과 공간 축에서 그저 희미한 한 점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는 우리의 좌표 값을 유의미한 값으로 만들기 위해 정진해야 한다.
5.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안다
안중근의사의 죽음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생각하게 된다.
많은 성현들의 가르침이 있고, 부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많은 사람들이 받고 있지만 가르침을 받는다고 모두 성현이 되지 않고 부처가 되지 않는다. 이는 깨달음은 전해져 오는 말과 글 자체에 있지 않고 모든 사람들 각자의 살아 온 환경과 처해 있는 현실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역설이 숨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부처님의 진리를 말로써 이해한다고 해도 그걸 몸으로 받아서 실천하여 온 몸으로 이해할 때 비로소 ‘터득’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나는 내가 존재하는 정확한 좌표를 알고 그 좌표 위에서 내가 의미 있는 존재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것이 ‘Who am I?-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I am who I am-나는 내가 누군지 안다’라는 답을 구하는 평범한 길임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