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禪과 그림을 이야기하자는 판에 자꾸 어부 이야기로 이어져서 유감이기는 하지만, 마지막으로 다시 어부도 하나를 더 감상하고 가야하겠다. 앞서서 이야기 했듯이 어부라는 캐릭터는 매우 복잡해서 아직 세속을 버리지 못하고, 그렇다고 그 난장에서 함께 범벅이 되고 싶지도 않은 이중성을 지닌 인물이어서, 세상 언저리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우리네 삶과 닮아 있기 때문에 자꾸 눈길이 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제까지 수많은 어부그림이 전해져 내려오지만 몇 회 전에 언급됐던 <어옹귀조도>를 그린 이숭효의 아들, 이정(나옹懶翁 李楨, 1578~1618)의 어부 그림이 오늘의 주제이다. 이정의 할아버지는 유명한 나한도를 그린 이상좌李上佐이며, 숙부는 역시 도화서 화원이었던 이흥효(李興孝, 1537~1593)로 조선 초기 유명한 화원 가문이었다. 이정 역시 이러한 내력 덕인지 몰라도 그림에 걸출한 솜씨를 보였다. 이숭효가 일찍 타계하는 바람에 그의 아들은 동생인 이흥효의 손에서 자랐다고 한다. 흥효 역시 도화서 화원으로 아카테믹한 걸작을 남기고 있다. 그의 집안 이들의 신분이 모두 도화서 화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정의 <산수도화첩>에 포함된 그림들은 선비풍의 문인수묵화로 일관되어 있다. 몇 점 안되는 그의 유작들은 한결같이 방일(放逸 ; 호방하면서 거리낌 없는)하지만 품격이 있는 필법이 돋보인다. 그의 교우 중 유명한 이가 〈홍길동전〉의 허균이다. 허균은 아홉 살이나 어린 그를 매우 아꼈다고 하며 나옹이 그린 그림을 사랑방에 붙여놓고 감상하는 것이 큰 낙이기도 하였다. 그가 삼십세에 요절하자 너무나 애통하여 〈이정애사李楨哀詞〉라는 추모전기를 남겼을 정도이다. 허균의 글에 따르자면 이정을 잉태할 적에 어머니는 황금빛 나한이 품으로 뛰어들면서 ‘너희집 삼대의 네 사람이 모두 부처님을 잘 그려 수천장이나 되니 내가 부처님 뜻을 받들어 자식이 되어 보답하러 왔다’는 태몽을 꾸었다고도 한다. 평양으로 몸을 피해 있을 당시 금강산으로 들어가 스님이 되기를 기약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나이 서른에 요절하고만 화가이기도 하다. 이름 없는 화원이 될 뻔한 그의 일생이 허균 덕에 일부나마 글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으니 화원화가의 기록 치고는 드문 일이기도 하다. 절친 허균은 그에게 그림을 여러 차례 부탁하였고, 이정은 산수인물이나 이백, 도연명, 소동파와 같은 은일을 즐겼던 인물을 그려주었다고 한다. 물론 유사 이래로 대부분의 사대부 문인들이 그리워한 것은 조정의 앞 뜰 보다는 강호의 맑은 바람이었으므로 이들의 정서가 산중의 그것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강호란 말 그대로 강과 호수 아니던가. 산중은 들어가는 것이지만 강은 건너야 한다. 강을 건너는 데에는 배가 필수이다. 어부는 스스로 강을 건너기도 하지만 또 강을 건네주는 사람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건너가는 것’을 일종의 통과의례로 보자면 그림 속 어부는 내 마음을 맑은 쪽으로 실어다 주는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정 화첩 중에는 <어부도>가 포함되어 있다. 삼십세에 요절한 작가의 붓질 치고는 너무 노숙하다는 평이 있는 작품이다. 그림 속에서 어부는 어께에 도롱이를 걸치고 머리에는 밀짚모자를 쓰고서는 별로 믿음직스럽지 않은 작은 배에 긴 노를 저으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주인공은 어딘지 모르게 위축되어 있고, 어설프게 몸을 둥그린 모습에서 초탈이니, 초월 이니 하는 한가함보다는 좀 여유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 그림 속 어부는 급히 떠나는 듯한 그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도롱이를 뒤집어 썼으니 비가 오락가락하는 여름쯤의 풍경으로 생각된다. 화첩 속에 있는 다른 그림들과 연관성을 굳이 찾을 수는 없으나 내 마음을 싣고 그 어부가 가고자 했던 강호江湖는 어디쯤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