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공부를 할 때, 친하게 된 영미(가명)가 이번 학기 부산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어제 5월 초 쯤에 서울에 오겠다고 전화를 했다. 내 집은 그 친구의 서울 아지트이다. 나는 길지 않은 통화 중에도 은선 언니와 한스(둘 다 가명)의 안부를 물었다. 영미는 “잘 지내요∼”하고 말끝을 부산 어투로 길게 늘린다. 영미는 한 때 은선 언니 네에서 도우미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어서 나처럼 두 사람을 무작정 좋아하지는 않는다. 셋은 애증 관계이다.
은선 언니는 교통사고로 후천적 장애인이 되었다. 언니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항상 누군가가 언니를 먹여주고 입혀주고, 닦아주고 씻겨 주여야만 한다. 영미는 한스가 출근하고 퇴근해서 돌아오는 시간동안 언니를 돌보아 주어야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은선 언니는 기억을 잘하지 못한다. 아주 절친한 사람과 매우 중요한 사건들만을 기억할 뿐이다. 새롭게 기억하는 것은 모두 잊어버린다. 언니의 머리는 굵은 체와도 같다. 영미가 책을 읽어주는 것은 좋아했지만, 방금 읽어 준 내용에 대해 물으면 언니의 눈은 허공을 보곤 했다. 언니는 하루 중 많은 시간을 한자를 쓰는데 보냈다. 연필을 주먹 쥔 손에다 꽂아 주면, 잘 보이지 않는 눈 때문에 머리를 종이에 박은 자세로 한 획 한 획 그림 그리듯이 한자를 썼다. 제 마음대로 흔들리는 팔에 있는 힘을 다 주어 써서 그날의 한자를 다 쓴 후에는 지쳐서 한잠 자야할 정도였다. 그 한잠 후엔 방금 전 썼던 한자를 기억하지 못했다. 옆에서 보고 있는 사람이 더 안타까워서 ‘그만 좀하지.’ 싶을 정도였다.
은선 언니에게 한자는 과거를 추억하는 힘이고, 미래를 살아내려는 의지이다. 60년대 말 간호조무사로 독일에 왔지만, 똑똑하고 의지력이 강한 언니는 대학에서 중국어학을 전공을 했다. 사고가 나기 전까지 언니는 중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고는 한스와 이별 여행을 떠났을 때 일어났다. 어느 모임에서 언니를 본 한스는 첫눈에 반했다. 그 때 언니는 한국 남자와 결혼한 상태였지만 사랑에 빠진 남자에게 그것은 대결하고 승리를 해야 하는 장애에 불과했다. 언니는 어땠을까? 아마도 언니는 ‘한스’라는 새로운 사랑에 저항했던 것 같다. 60년대의 한국적 청춘에게 한스라는 사랑은 불륜이었을 것이다. 거부할 수 없었던 사랑에 저항하던 청춘, 은선 언니는 남편과도 떨어져, 한스와도 떨어져, 사랑이 주는 모든 행복을 포기한 사람으로 살기로 작정했던 것 같았다. 만약에 언니가 중국에 갔더라면, 그곳에서 사랑이 사라지고, 과거가 사라지고, 그래서 사라진 모든 것들이 괴롭지 않았을 때가 왔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은선 언니는 사랑보다 강한 여자로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스와 은선의 \'운명에 대한 사랑 (amor fati)\'은 각자의 운명을 자신들이 어디로 다다를지도 모르는 미궁으로 데려갔다. 은선과 한스의 마지막 여행은 독일 신문에 날 정도의 끔직한 교통사고로 끝났다. 조수석에 앉았던 은선 언니는 대수술을 받았고, 약 5개월 동안 의식 불명의 상태로 누워 있었다. 운전을 했던 한스는 중상이었지만 곧 몸을 추스를 수 있었다. 한스는 언제나 언니의 병실에 있었다. 당시 의대생이었던 한스는 예의의 독일인답게 처음에는 언니의 상태를 기록을 했다. 의식 불명의 상태가 길어지면서 그는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강박적으로 은선의 작은 움직임과 옹아리 비슷한 신음소리들의 횟수와 형태를 적어갔다. 은선이 깨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들 때마다 미치도록 괴로웠다.
은선이 예전처럼 살아나리라는 희망이 사라지자, 한스의 노트는 기적이 없는 곳에서도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그 무엇이 되기 시작했다. 그는 세상에서 은선이 사랑했던 것들과 앞으로 은선이 깨어나서 사랑하게 될 것들을 절대로 잊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한스는 의식을 잃은 은선의 매일 매일이 어떻게 같으면서도 다른지, 병원 밖의 친구들에게 어떤 기쁜 일과 슬픈 일이 생기고 사라졌는지를, 눈을 감고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 은선이 지금 그에게 얼마나 많은 말을 해주고 있는지를 적고 또 적었다.
그는 세상을 향해 자신을 닫아버린 은선을 대신해서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려고 애썼다. 그는 은선이 깨어날 날을 대비해서 은선이 잠들었던 날을 증거해야만 했다.
의식불명의 상태로 누워 있는 은선 옆에서 한스가 매일 쓴 사랑의 고해성사와도 의식은 그를 사랑에 대해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은선과 은선의 남편까지 포함한 은선의 모든 이와 은선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한스는 사랑에 대해,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욕심을 낼 수 없게 되었다. 그가 해야 했던 사랑은 지금처럼 그 자리에 머물러 주는 사랑뿐이었다. 바라보는 사랑뿐이었다는 것을 한스는 깨달았다. 한스가 사랑 속에서 ‘자기’를 무너트리자 은선이 깨어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깨어난 은선 옆에는 한스 밖에 없었다. 죽음과도 같은 곳에서 돌아온 은선 역시도 몸과 마음이 무너져 있었다. 돌아온 은선은 사랑에 저항하지 않았다. 한스의 젖먹이 딸이 된 것처럼 그가 주는 모든 것을 무조건적으로 받았다. 그리고 한스의 보살핌을 받을 때마다 얼굴을 찡그렸다. 웃음이었다.
몇 년 후 둘은 드디어 그들이 소원했던 결혼을 했다.
인생이 동화와 같다면, “둘은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은선과 한스의 사랑 이야기를 끝맺어야 할 것이다. 분명 젊은 날의 은선과 한스는 사랑해서 행복하기를 원했다. 기쁜 젊은 날, 둘은 반짝반짝 빛나는 기쁜 사랑을 꿈꿨다. 간절한 청춘의 날, 둘은 불륜도, 스캔들도 다 깨트린 위대한 사랑을 꿈꿨다. 지금의 한스와 은선은 어쩌면 그 옛날의 소원을 이룬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소원은 그들이 원했던 방식과는 다르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둘의 사랑을 보면, 어쩌면 사랑은 행복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벌써 전설이 되어버린 둘의 사랑을 보면, 차라리 사랑은 초월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초월을 깨닫는 것이 사랑의 숭고한 경험인 것 같다. 은선에게 한스는, 한스에게 은선은 각자의 운명을 어디로 데려갈지를 모르는, 가슴 속에 어둠을 품은 미로였다. 한스에게도 은선에게도 미로에서의 탈출은 저 높은 곳을 향해서 나는 것이 아니었다. 각자의 운명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은 오히려 추락해야 했다. ‘자기’를 끝도 알 수 없는 심연에 떨어뜨리는 하강을 했다. ‘자기’라는 것을 무너트리는 소멸을 했다. 은선과 한스의 사랑은 광활한 어둠 속에서 별이 폭발하면서 내는 아름답고도 슬픈 빛과도 같다. 그 빛은 사람들이 구하는 행복에서는 얻을 수 없는, ‘초월’이라고 밖에는 부를 수 없는 빛이다.
은선과 한스는 어둠 속의 작은 별들이다.
둘은 우주의 검은 땅, 별빛이 떨어진 곳에서 사랑이 일어나는 것이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어두운 별들이다. 우리가 밤하늘의 별을 보지만 사실은 어둠을 먼저 보아야하듯이, 사랑은 행복을 비추는 어둠이다. 빛은 어둠 없이는 있을 수 없지만, 어둠은 빛 없이도 있을 수 있다. 둘은 행복이 사라진 곳에서도 어둠과도 같은 근원적인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떨어지는 별들이다.
먼 하늘, 섬광처럼 떨어지는 별빛은 자기를 무너트린 곳이 사랑으로 채워지는 초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