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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와 해강 김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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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이야기 - 성안┃팔만대장경 보존국장 2011년 05월 351호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현판의 좌우 기둥에는 “불신충만佛身充滿 법력난사法力難思”라는 주련이 있으며, ‘부처님은 법계에 충만하시고 법력은 불가사의하다’는 뜻이다. 먼저 주련柱聯의 의미를 살펴보면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로, 기둥柱에 시구를 연하여 걸었다는 뜻이며, 좋은 글귀나 남에게 자랑할 내용을 붓글씨로 써서 붙이거나 그 내용을 얇은 판자에 새겨 걸기도 한다. 판자 아래위로 하엽荷葉을 양각陽刻하든지 연꽃을 새기든지 당초무늬를 새기든지 하여 윤곽을 정리하고 그 가운데에 글귀를 적어 새김질한다. 글씨의 윤곽만 새기는 기법을 쓰는 것이 보편적인 방식이지만, 드물게 튀어나오도록 양각하는 수도 있으며, 양각한 부분과 새김질한 글씨에 색을 넣어 장식하기도 한다. 이 주련은 해강海崗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의 작품이다. 김규진은 1868년(고종 5년)에 평안남도 중화군 출생으로, 눌인訥人 조강진曺匡振에게서 글과 서예를 배우고 외숙부 소남少南 이희수李喜秀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김규진은 18세인 1886년부터 26세인 1894년까지 8년 동안 중국의 북경, 남경, 양주와 상해에 머물며, 물밀듯 쏟아져 들어오는 서구의 신문물을 통하여 안목을 넓히고, 또한 유명한 서화가들을 찾아다니며 전서篆書 · 예서隸書 · 해서楷書 · 행서行書 · 초서草書등의 서법과 화법의 진경眞景을 터득하였으며, 특히 사군자 중에서 난죽蘭竹이 절묘하였고, 글씨는 대자大字를 특히 잘 썼다.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해강을 궁중으로 끌어들인 것은 중국에서 맺은 민영익 · 민영선 형제와의 교분이었다. 왕실의 외척이었던 민영선은 그를 영친왕英親王에게 서화를 가르치는 서사書師로 고종高宗에게 천거한다. 고종은 왕자의 글선생을 눈여겨봤다. 당시 대한제국 황실에서는 황실전용 사진사로 일본인 무라카미 덴신(村上天眞)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나라의 위신상 옳지 못하다고 본 고종은 이미 서양문물을 접해본 김규진을 일본에 유학시켜 사진을 배우게 한다. 중국을 거쳐 일본 사토(佐藤)사진관과 노노미야(野野宮)사진관에서 고종의 특명으로 사진을 배우고 돌아온 김규진이 1903년에 서울 소공동의 2층 집에서 영업을 시작한 것이 바로 조선인에 의한 조선 최초의 사진관 ‘천연당天然堂’이었다. 김규진은 같은 건물에 고금서화관古今書畵觀이라는 화랑을 차리고 표구도 하였다. 1915년에는 서화연구회書畵硏究會를 만들어 학교격으로 후학을 가르치며 3년 졸업제를 시행했다. 교본으로 화법진결畵法眞訣, 난죽보蘭竹譜, 육체필론六體筆論등을 만들어 서화교육에 힘썼다. 그때 이응로, 이병직, 강신문, 민택기와 윤희채등이 김규진의 제자들이다. ‘서화연구회’는 친일 매국노로 알려진 이완용李完用 일파가 이끄는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와 민족 사상적 대결을 이룬 것으로 유명하다. 김규진은 근세인으로 명산대찰에 가장 많은 묵적을 남긴 사람으로는 손꼽히며, 대표적인 사찰과 전각은 다음과 같다.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백양사, 범어사, 쌍계사, 마곡사, 용주사, 전등사, 고란사, 오어사, 건봉사, 개심사, 보석사, 김룡사, 용궁사, 금강산 구룡폭포, 종로 보신각, 덕수궁 태극전, 진주 촉석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