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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이 따뜻한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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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이창수 2011년 05월 351호
세상엔 길이 참 많습니다. 도시에는 땅 위아래로, 동서남북으로 뻗은 길이 쫙 깔렸습니다. 바쁜 사람들, 바삐 다니는 길입니다. 시골에는 휘적휘적 산모퉁이를 돌아드는 산중길이 있고, 경운기 소리 요란한 들판 길도 있습니다. 자동차를 타면 휙 지나치는 빠른 길이고, 두발로 걸으면 상대적으로 느린 길입니다. 길은 걸어야 길입니다. 걷지 않으면 길이 아니라 그냥 땅입니다. 이곳과 저곳을 이어주는 것이 길이 아니라 내가 걸으면 그게 길입니다.
도시생활 40년에, 시골생활 10여년인 저는 많은 길을 다녔습니다. 어지간히 살았고, 어지간히 다녔습니다. 이제 도시는 옛날 길이고, 시골이 지금 길입니다. 산중턱에 살다보니 위로 향하면 산길을 가게 되고, 아래로 향하면 들판 길을 가게 됩니다. 어느 길이든 발을 내디디면 인연이 있게 마련입니다.
위로 잡아 산길을 걸으면 풀과 나무와 꽃들이, 갖가지 이름 모를 곤충과 새들이, 그리고 오랜 세월 진득하니 한 자리를 차지한 바위들을 만나고 지나치게 됩니다. 무척 좋아하는 길입니다. 세속의 인연보다는 숲속의 인연을 찾아 가는 길이기에 가능한 한 마누라도 떼어놓고 홀로 잘 갑니다. 이 길에 빠져들면 저들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발밑에 차이는 풀꽃 앞에 무릎 끓고, 혹은 배 깔고 엎드려 마주하다보면 오래지 않아 저들의 이야기와 숨소리가 들려옵니다. ‘밝고 밝은 풀잎마다 밝고 밝은 달마의 뜻’이라는 말씀이 스쳐 지나치는 그 모든 풀꽃마다 다 그러합니다. 게다가 숲의 틈을 비집는 바람이 송송 맺힌 이마의 땀을 스치고, 숲의 틈으로 새어드는 빛의 따뜻함이 등짝에 더하면 홀로 있어도 홀로 있지 않은 기쁨에 빠져듭니다. 풀과 나무들이 왕성하게 뿜어대는 숲의 향에 눈, 코, 입, 귀, 살갗 등 모든 감각이 열리면 마음도 열리고 맙니다. 숲길을 걷는 어느 순간은 마치 깊은 숲, 성스러운 곳에서 펼쳐지는 인디언 주술사의 몸짓과도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숲의 길을 걸으면 영성이 치유된다고들 합니다. 목적을 갖지 않고 어슬렁어슬렁 숲길을 걷는 발걸음은 이성의 몸부림보다는 감성의 환희를 깊게 느낄 수 있습니다. 내면의 숲길이 도처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걸어야 길입니다.
산중턱에서 방향을 아래로 잡아 걷는 길은 살아감의 길이고, 관계의 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물질과의 만남이 있는 길은 분명 드라마틱합니다. 인간 셋만 모여도 5000천년 인류 문화사의 모든 특징이 다 나타납니다. 희로애락은 물론이요, 탐. 진. 치. 삼계의 모든 것들이 얽히고 얽힌 것들이 항상 드러나는, 그래서 더욱 더 열심히 살 수 있는 길이 산 아래 길입니다. 인연 따라 자유롭게 돌아다닌다는 길은 산 윗길이요, 쉼 없이 부딪혀 깨달아가는 길은 산 아랫길입니다. 산 아랫길, 들판 길을 걷는 것은 우연과 필연의 관계가 있고, 예기치 않은 만남은 언제나 새로운 깨달음입니다.
봄볕이 따뜻한 어느 날, 봄바람에 끌렸습니다. 봄날은 할일이 없거나, 할일이 있어도 팽개치고 들판을 걸을 때가 잦습니다. 젊은 봄볕이 그러라고 부추깁니다. 멀리 보리밭둑에 있는 빨간 바구니가 눈에 들더니 밭둑에 앉은 할머니도 함께 보입니다. 만남입니다. 한 마디 말을 붙여 만남을 이었습니다.
“쑥 캐세요.” “쑥도 캐고, 너물도 캐고 그래.”
“일찍 나오셨네요.” “성이 나서 일찍 나왔어.”
“아침부터 웬 성이 나셨어요.”
“영감이 아침부터 자꾸 성 내잖아. 내 어제 약장수 쫒아서 광주로, 어디로 돌아다니다 왔는데 영감이 진즉에 잔뜩 화가 나 있드만. 영감 먹으라고 약을 38만원어치나 사왔는데 자꾸 성을 내는 거야. 영지에, 도라지에 몸에 좋은 게 잔뜩 들은, 뭔지 모르지만 영감에게 좋다 길래 사왔지. 어제 한 봉투 먹더니 맛이 없는지 속아서 왔다고 계속 성을 내잖아.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밥 대충 차려놓곤 바구니 들고 나왔지.”
“그런 거 반품해도 돼요!”
“약 가져왔으니 그냥 다달이 갚아야지. 내가 뭐에 홀렸나봐. 저~ 동네 할미도 같이 갔는데 그 할미는 28만원 밖에 안 샀데. 나는 38만원이나 샀는데. 영감이 먹든 안 먹든 내 한 일이니 내 갚아야지.”

세상살이가 이렇습니다. 놀러 가자는 약장수의 말에 아낌없이 홀린 할머니 마음과 이유를 알면서도 그저 성내는 할아버지가 서운한 할머니 마음. 할머니 혼자 놀러 다니다 늦게 들어왔다는 것만으로도 성이 난 할아버지 마음과 내 몸에 좋다는 약을 사들고 온 할머니가 고맙기는 해도 성이 풀리기엔 아직 시간이 필요한 할아버지 마음. 겉말과 속마음이 다른 약장수마음과 그렇게 해서라도 제 식구를 먹여 살려야하는 진정한 약장수 마음. 내 마음과 남의 마음이 다르고, 그 다름이 뒤섞이어 들판의 세상이 돌아갑니다. 이렇듯 길 위의 만남은 세상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겉모양보다는 속을 들여다보아야 깨달음이 있습니다. 겉을 보는 것은 눈으로 읽은 앎이고 앎을 다시 보는 것이 마음입니다. 결국 마음에 세상의 길이 있고, 세상의 길은 마음에 있습니다. 그런 세상을 마닥뜨리는 것이, 그래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내 발걸음에 있습니다. 굳이 선재동자를 들먹이지 않아도,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굳이 꼭 산을 오르지 않아도, 굳이 들판을 쏘다니지 않아도, 아무데나 내 발걸음에 세상이 있고 그 세상을 진정으로 맞이하는 마음이 살아감의 근본이 아닐까싶습니다. 모두의 발걸음이 부처의 발걸음인지라 부처를 없애야 부처를 볼 수 있다고들 말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 즈음, 봄볕은 따뜻하고 보리 싹은 푸릅니다. 길은 걸어야 길입니다.

유마약력
이창수님은 사진가이다.
봄에는 녹차를 만들기도 하고, 여름에는 나무에 매달린 매실을 따고, 가을이면 대봉감을 깎아 겨울에 곶감을 만들어 이사람 저 사람한테 팔기도 하며, 시간을 내어 순천대학교 사진예술학과에 나가 어린 학생들과 사진이야기를 나누며 놀고, 악양에 있는 지리산학교에서 아줌마, 아저씨들과 함께 사진기 들고 동네를 열심히 쏘다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