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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龍門과 불문佛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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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의 향기 - 경성┃ 희랑대 감원·중앙승가대 2011년 04월 350호
용문이란 등용문登龍門으로 잉어가 등용문을 통과함으로써 용이 되고, 만약 통과하지 못하면 이무기로 전락해 버린다는 전설적인 통과의례를 가리킨다. 황하黃河 강 상류의 하진河津이란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일화로 하진은 황하 상류 작은 마을 이었는데 용문이라고 불리어졌다. 이곳은 그 근처에 급류가 흐르고 있어서 배가 다닐 수 없었고 그 밑으로 큰 고기들이 수없이 모여 들었지만 거센 급류를 거슬러 오르지 못하였으며, 만약 오르기만 하면 용龍이 되었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이응전李膺傳에 의하면 후한시대의 당상관 이응李膺은 당시 권력을 장악한 환관들로 인해 충신들이 힘과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시대의 사람이지만, 환관의 위세威勢에 조금도 눌리지 않고 자신의 의지와 주관을 꺾지 않았던 인물로 칭송되었다. 이처럼 이응은 모든 관리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후생後生인 젊은 관리들까지 이응을 일컬어서 득세한 환관들의 힘과 권세에 위압되지 않는 기백이 대단한 것이 마치 용문에 올라간 것과 같다고 찬탄하였다고 한다.
권력과 불의不義에 굴屈하지 않고 소신과 정의正義를 실현하거나, 물고기가 용으로 승천昇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용문을 뛰어 올라야만 하는 것처럼, 중생衆生이 불보살佛菩薩의 깨달음을 성취하고 완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불문에 의지하고 수행하여야만 가능하다.
불보살의 깨달음(각覺)이란 보리菩提이며, 보리는 결국에 자비와 지혜를 원만하게 구족具足함으로써 실현된다.
그러므로 자비는 보리의 실천적實踐的이고 현상적現象的인 측면이며, 지혜는 보리를 이상적理想的이고 이론적理論的으로 설명하는 지침과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하자면 보리를 사事적인 입장으로 관찰하는 것이 바로 자비이며, 보리를 이理적인 방향으로 논하는 것이 지혜인 것이다.
이와 같은 보리의 두 가지 측면을 우리들에게 배대하자면 자비란 마음이고 손길이며, 지혜란 정신이고 머리이며 두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자비와 지혜를 구족하지 않았다면 원만하고 완전한 보리를 증득하였다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과 정신이 올바로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원만한 인격人格과 성품性品을 지녔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건강한 정신에서 건강한 생활과 삶이 비롯된다는 명제는 마음보다는 정신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주장이다. 반면에 마음이 따뜻해야 사람이지 머리만 좋다고 사람인가 라고 생각할 때에는 머리나 정신보다는 마음과 손길이 더욱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입장이다.
머리는 좋은데 공부나 노력을 하지 않거나 혹은 훌륭한 목표와 원대한 뜻을 마음에 품고 있기만 하고 목표와 뜻을 이룩하고 펼치기 위해서 아무런 노력도 실행하지 않는다면, 뛰어난 머리는 물론 훌륭한 목표와 원대한 이상까지 모든 것이 아무런 소용도 없고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되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머리는 뛰어나지 않더라도 부지런히 노력하고 열심히 공부한다고 한다면, 근면과 성실한 노력이 우수한 머리보다 더욱 중요하고 소중한 가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훌륭한 목표와 원대한 뜻을 이루고 실현하기 위해서 불철주야로 각고刻苦의 노력을 기울인다면, 설령 목표나 이상을 완전하게 성취하지는 못하더라도 인생의 의미와 존재의 가치라는 소정의 성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물론 명석한 두뇌로 열심히 공부하거나 목표와 이상을 향해서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이 최상의 여건이지만, 어떤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인가를 선택하자면 우수한 두뇌나 훌륭한 목표보다는 열심히 노력하는 근면하고 성실한 태도와 자세가 더욱 중요하다고 보아야 한다.
불교적인 근면 성실이란 바로 근수역행勤修力行, 부지런히 닦고 온 힘과 정성을 기울여서 실행하는 수행을 가리키며, 이러한 수행의 첫 번째 단계는 자비이며 보시라는 것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이유와 어떤 관점에서 자비와 보시를 실천해야만 하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인가에 대해서 철두철미하게 이해하는 것이 바로 지혜의 참된 실상이다. 그러므로 자비와 보시를 근수역행하는 참된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고 체득한다면, 중생을 응대應對하는 무한하고 무량한 보살심과 보리심이 솟아나게 될 것이다.
보리,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가는 도정道程에서 지혜에 치중하기 보다는 자비로운 보시행과 보살행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대승불교의 관점이다. 지옥에서 일일일야一日一夜에 만사만생萬死萬生하는 무시무시한 고통을 치러내는 중생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는 한, 절대로 보리를 완성한 부처가 되지 않겠노라는 지장보살의 지극한 발원과 수행이 이를 대변代辯한다.
마찬가지로 보살의 수행을 지향하고 수순하는 참다운 불자라면 머리나 두뇌보다는 마음과 손길을 중시重視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단편적으로 지혜의 완성만을 추구한다면 대승의 보살이라는 본연本然의 위상位相을 상실한 것과 다르지 않다. 중생을 외면한다면 보살도 깨달음도 마침내 존립存立의 의미를 퇴색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도 중생을 위해서 무한하고 무량한 보시와 자비를 펼치려는 의지와 발원으로 사바세계에 화신化身을 나투셨음이 더욱 선명鮮明한 시절이다.
자비와 보시에 관한 이해와 실행으로 보리를 향하고 추구한다면, 용문을 거슬러 올라 용으로 승천하는 물고기처럼, 권세와 불의에 굴하지 않고 의지와 정의를 실현하는 현인賢人처럼, 불문의 중심中心으로 박차고 들어가 마침내는 깨달음을 증득하고 불도佛道의 광명光明을 펼치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確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