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야총림은 일제 패망 직후인 1945년 9월, 식민지 불교의 극복과 불교계의 새로운 노선을 천명하기 위해 개최된 전국승려대회에서 결의해 설립한 모범 총림이었다. 1946년 10월경 효봉 스님을 방장으로 추대하고 개설되었다.
나는 종단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총림에서 선지식들과 함께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때부터 마음이 온통 가야총림으로 쏠렸으나 어떻게 가야 할지 몰라 애를 태웠다. 그런데 마침 선방스님 한 사람이 백양사에 들렀기에 “해인사 총림으로 가고 싶은데 어떻게 가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가 “나도 그곳으로 가려고 하니 같이 갑시다” 했다. 그 소리에 천군만마라도 만난 듯 반가워서 신도들이 만들어준 복주머니를 그에게 주었다. 금으로 만든 자그마한 물건과 돈이 들어 있는 주머니였다. 얼마나 해인사로 가고 싶었던지 신도들로부터 시주받은 전 재산을 준 것이었다.
그날 밤, 해인사 총림으로 가서 본격적으로 공부한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잠시 눈을 붙였는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되는 꿈을 꾸었다. 목선木船을 타고 좁은 골짜기에서 한참 고생을 하다가 이윽고 골짜기를 벗어나 태평양 한가운데의 넓은 바다로 나와 한없이 노를 저어가는 꿈이었다.
해인사를 가기 위해 동행이 된 선방스님을 따라 걸망에 가사장삼을 넣어 걸머지고 백양사를 나왔다. 실로 10년 만에 백양사를 벗어나는 셈이었다. 백양사를 떠나 광주의 한 절에서 하룻밤을 자고 떠나려고 하는데 그만 그곳에서 우연히 만암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만암 스님은 나를 놓아주려 하지 않으셨다. 천성적으로 둘러댈 줄 몰랐던 나로서는 붙잡으려고 설득하는 만암 스님의 곁을 떠나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동행했던 선방스님이 총림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내 간절한 심중을 대변해주자 만암 스님은 아쉬워하며 내 뜻을 받아들여주셨다. 내 인생이 그만 바뀌는 순간이었다.
젊은 날 이사理事를 아우르는 법을 배우면서 따랐던 만암 스님과는 그렇게 헤어졌다. 그 후 만암 스님은 정화 이전 조계종 제4대 종정, 승단정화운동의 과도기인 조계종 비구승단 초대 종정을 지내고 1956년에 입적하셨다.
하지만 어렵사리 백양사를 떠나 해인사로 가던 길에 잠시 봉암사를 들렀다가 그곳에서 성철 노장을 만나 결사 대열에 합류했다. 나중에 들으니 노장도 해인사 총림에 참여하러 가셨다가 뜻이 안 맞아 나와서 봉암사 결사를 추진하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노장도 나도 1967년 해인총림이 다시 결성되었을 때 해인사로 들어가, 노장께서는 입적하실 때까지 25년여를 계셨고, 나는 1969년에 해인사를 나와 수도암으로 갔다가 1984년에 다시 들어와 지금까지 25년을 머물고 있으니 시절인연은 그렇게 흐르는 모양이다. 어린 학인 시절 해인사가 그렇게도 그리웠으니 전생의 인연 때문이었을 것이다.
종정스님 자서전 《누구없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