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유랑하는 순대 마차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사랑할 땐, 별이 되어 - 정인경┃철학박사 2011년 01월 347호
“나이팅게일은/사랑 노래를 부를 때/가시로 자기 가슴을 찌른다./우리 또한 모두 그와 같네./달리 어떻게 노래해야 할까?” (칼릴 지브란)

밤 비행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면, 마치 그 곳이 밤하늘 같다. 지상에서 반짝이는 모든 불빛은 별처럼 보인다. 세상의 불빛을 가만히 내려다보면 하나하나가 천상의 별처럼 먼 곳에서 온 사랑을 숨기고 있는 것 같다.
저 아래 여느 빛에서 아이들이 태어나고, 먼 곳 어떤 빛이 연인들의 사랑을 비춰주고, 어느 빛에서 누군가는 소박한 저녁을 먹을 것을 생각하니, 이 세상의 모든 불빛 속, 사람들은 빛의 이야기를 검은 땅 속에 가지고 있는 씨앗 같았다. 그들 모두는 빛의 씨앗들 같았다. 큰 밝음도 작은 밝음도, 선명한 반짝임도 희미한 반짝임도, 착한 불도 나쁜 불도, 칠흑처럼 어두운 지상에서 무엇인가 의미를 만들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오늘 땅 위를 떠도는 유랑별을 만났다.
우리 아파트에 수요장이 선 이후로 매주 우리 동네를 찾아오는 순대, 오뎅, 떡볶이를 파는 부부와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이전부터 순대를 사면서 안면을 트고는 있었지만 이야기를 할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별을 가리는 구름처럼, 우리들의 마음에 낀 안개가 거쳐, 부부는 홀연히 구름 속에서 빠져나와 원래의 빛을 보여주었다.
“아줌마 순대 2인분 싸 주세요. 내장 빼구요.”
“네.”
아주머니가 김이 펄펄 나는 순대를 꺼내 능숙하게 쓱쓱 저며 내었다. 일회용 스트로폼 접시에 순대를 담고 있을 때, 옆에서 떡볶이를 젓고 있던 아저씨가 앞치마를 풀면서 어디를 가려는 듯 서둘렀다. 아주머니는 으레 그렇다는 듯이 별반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손은 순대를 포장하는 데 여전히 분주하면서도, 냉장고 안 냄비에 생선조림이 있으니 데우고, 깜박 잊고 김치를 쓸어 놓지 않았으니 꺼내 쓸어 먹으라고 이야기를 했다.
“걱정하지 마슈. 냉큼 다녀 오겠어유.”
아저씨는 장난스럽게 사투리를 흉내 내고는 지하철을 타는 방향의 아파트 진입계단으로 달리다 싶게 걸었다. 호기심이 들었다. 먹을 것을 파는 사람이 밥을 먹으러 집에 간다는 게 웃겼다.
“진지 잡수시러 집에 가시나 봐요?”
“웬걸요. 집에 시어머니가 중풍으로 누워계신데 전혀 움직이지를 못하고 정신도 없고 하셔서 점심 챙겨 드리러 가요.”
“댁이 가깝나 보네요.”
“안양이에요.”
“네?!”
아주머니는 어눌하게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5년 전부터 서울 아파트들의 요일장이 서는 곳을 돌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장사를 했단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중풍으로 전혀 거동을 못하셔서 아저씨가 12시가 되면 잠시 장사를 접고, 안양 집으로 가 노모에게 점심을 챙겨드린 후, 다시 돌아와 오후 장사를 하기를 3년이 되었단다. 남편이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를, 병으로 누워 있는 시어머니가 얼마나 불쌍한지를 얘기해 주었다. 아주머니가 특별할 것도 없는 자기의 일상을 이야기해 주었지만, 나에게는 각별한 이야기가 되어 들렸다

이야기를 다 끝냈을 때, 아주머니의 눈은 열정의 빛을 수줍게 감추고 있었다. 아주머니의 촉촉하게 적은 눈빛은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를 건네주고 있었다. 그 순간 우리 둘 사이에 밀폐된 마음의 비밀 같은 것은 사라져 버렸다. 이 사람에게서 돈을 주고 무엇인가 산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 되어버렸다. 조그마한 생활을 가르쳐 준 이 지상의 돈이 정녕 아주머니에게 필요할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시큼한 순대 냄새에 절고 시뻘건 떡볶이 국물에 얼룩진 별 하나가 내 앞에서 감춰졌던 빛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통 받는 사람에게 동정심은 내기는 쉽지만, 그 사람과 함께 지내는 것은 쉽지 않다, 비록 그 사람이 내 아버지건, 내 어머니인건 간에. 병환 중에 있는 연로한 부모, 또는 치매에 걸린 부모 때문에 집안이 갈라지는 경우를 내 주위에서 종종 보았다. 그런데 아주머니에게서는 고통스런 현재를 벗어나려는 갈구를 찾아 볼 수 없었다. 아니 희망찬 미래를 애원하는 기색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아주머니는 병든 노모와 착한 남편에 대한 사랑을 소원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아주머니의 현실은 오지 않은 미래보다 강했다. 현재가 희망이고 사랑이었다.

평범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한 순대 마차 안에서 아주머니는 오늘 하루의 내 몫의 인생을 가치 있는 것으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그저 이 순하고 욕심 없는 사람과 마주해서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단순한 일이 나에게 정직하고 열려져 있고, 거짓 없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존경과 신뢰를 갖게 하고 있었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사실은 나에게 무언가를 묻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려 준 그 시간 동안 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짧지만 깊은 시간을 나에게 주고 있었다.

나를 포함해서 도시의 사람들은 양극단에서 살고 사랑하는 것 같다. 한 극단은 타인을 존중하고 사랑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아마 전설이 된 사랑이겠다. 다른 한 극단은 자신을 변화시키려하지 않는 사랑이다. 타인이 자기를 배려하고, 인정하고, 존경해야하는 관계이다. 극단의 사랑은 고독이고 외로움이다. 차라리 고통이다. 그래서 나는 도시라는 사람이 살지 않는 사막에서 고독했고, 서울이라는 사람을 찾을 수 없는 무인도에서 외로웠다. 도시의 밤, 잠들지 못하는 내가 미로를 헤매 일 때, 기대하지 않았던 곳의 하늘에서 별이 반짝인다면, 별은 하나의 구원이 된다. 별은 어둠을 휘황하게 밝히거나, 빛만을 비추지 않는다. 별은 어둠과 빛을 모아서 아름다움 속에 있게 한다. 별은 사막의 고독과 무인도의 외로움을 모아 아름다운 꿈으로 바꾼다. 별은 사랑인 것에 대한 꿈이다: 어느 누구도 고통을 선택하려하지 않지만 사랑은 기꺼이 고통과 함께한다.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곳은 고통이기 때문이다.

아주머니 부부는 이제 나에게는 정오에 뜨는 쌍둥이별이 되었다.

오늘 쌍둥이별이 비춰 준 빛은 내가 죽는 날까지 계속 될 것이다. ‘사랑보다 더한 의무가 있을까?’라고 태양의 불빛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빛나는 별빛이 될 것이다.
내가 사랑을 시작할 때, 쌍둥이별이 뜰 것이다. ‘사랑은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고, 무의미한 인생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바꾼다’면서 반짝일 것이다.
내가 사랑을 하고 있을 때, 쌍둥이별은 ‘사랑을 하면 사람들이 사는 곳이 온통 사랑으로 가득한 곳이 된다.’면서 깜박일 것이다.
내가 사랑을 끝낼 때, 쌍둥이별은 ‘태양이 어둠 속으로 들어가지만 다음날 사랑으로 떠오를 것을 믿는 것이다’라고 빛날 것이다.

검은 땅에 수정 같은 투명한 빛으로 박힌 쌍둥이별은 앞으로도 매주 수요일 우리 동네를 찾아올 것이다. 나는 그 때마다 쌍둥이별을 만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생애 마지막 같은 사랑에 대해 들려 달라고 눈빛으로 채근할 것이다. 올해도 쌍둥이별은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별을 보며 삶의 궤적을 쫓던 목동처럼 순대마차를 끌고 유랑할 것이고, 도시의 고독과 외로움, 사랑과 우정을 모아 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를 밤하늘에서 내려보면 어둠 속에서 수련처럼 피어난 별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