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발이 흩날리는 회색빛 도심은 서늘하다 못해 차갑고 무겁기까지 하다. 빌딩과 빌딩 사이를 지나가느라 거세진 바람과 마음에 달라붙을 것만 금속성 때문인지 도시의 겨울은 더 춥게만 느껴진다. 그렇게 눈발이 머리 위에서 원을 그리다 몰려가버리던 어느 날 종로의 한 골목에서, 서울에 잠시 출타하셨다는 심산 스님을 만났다. 도심 포교에 있어 롤 모델이라는 스님이 길 건너편에서 환히 웃으셨다. 도심에서만 20여년을 포교하며 지냈다기에 냉철하고 사무적일 것만 같았는데 길 건너에서도 느껴지는 그 푸근함은 시골의 작은 여염집에서나 봄직한 것이었다.
스님은 93년도부터 통도사 부산 포교원에서 10년, 홍법사에서 10년 동안 주지로 있으며 도심 포교에 있어 큰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워낙에 도심 포교원치고는 큰 규모로 시작했는데 스님의 포교활동은 그 큰 공간을 사람으로 북적이게 만들었다. 도시인들의 마음이란 게 빌딩과 빌딩 사이를 지나는 바람처럼 욕심과 욕심 사이를 지나느라 더 거세기 마련인데 그런 도심에서 어떻게 따스한 바람처럼 사람들의 등을 밀어 부처님 앞에 앉게 할 수 있었을까.
“적어도 10년 세월이 흐르면 결실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누군가 결실을 맺지 못 했다고 말한다면, 그건 결실을 빨리 맺으려 했기 때문이겠지요. 무엇을 얻기 위해서는 그 만큼 익고 묵어야 해요. 그런데 그것이 기다리기 위한 기다림이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저 매 순간 최선을 다하다 보면 세월이 가고 세월이 가면 반드시 결과가 나오는 것이지요.”
현재 통도사 도심 포교원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포교원 공간을 기부했던 건설사의 부도로 자리를 잃고 헤매다가 한 보살님이 쾌척한 농장으로 자리를 옮겨 홍법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일어섰기 때문이다. 그것이 2002년도의 일인데 그 당시엔 농장이 그린벨트, 상수원 보호 구역이어서 집을 짓지 못 하고 가건물을 지어 살다가 얼마 전에야 그린벨트가 풀려 2009년 4월에야 법당을 조성했다. 가건물과 비닐하우스에서 지내야 했던 좋지 못한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초하루 법회 때만 찾아오는 신도가 800여명에 달한다. 그렇기에 스님은 홍법사의 10년 세월엔 통도사 부산 포교원의 10년 세월이 함께 묻혀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 20년의 세월 이야기와 함께 도심 포교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젠 생활과 종교가 분리되어서는 안 돼요. 수행이 생활이고 생활이 수행이 되려면 절이 가까이에 있어서 언제든 찾아가 향 피우고 절하고 법회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포교에 있어서는 많은 부분이 도심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산중 사찰이 그것의 보조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스님의 의견이다.
“현재 산중 사찰은 유지하기도 힘든 곳들이 많아요. 그리고 도심 포교원은 사찰의 정취를 목말라 하고 있어요. 그렇기에 도시에 사는 아이들이 시골 친척집에 가듯이 도심 사찰과 산중 사찰이 연계되어야 합니다.”
스님은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초동 대성사 주지를 하다가 공군법사를 다녀와 통도사 강원에 다녔다. 그리고 강원을 졸업하자마자 통도사 부산 포교원의 주지 소임을 맡았다. 그렇게 해서 포교로만 20년 세월을 살아왔다. 선방 한번 가보지 않았다. 그저 매 순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 남들이 생각지도 못 하는 일, 안 될 거라고 체념하는 일들도 스님은 차근차근 해왔다.
“도심 포교에 있어서는 더욱, 정법으로 나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면 안 돼요. 정법만이 가장 오래까지 당당할 수 있어요.”
스님이 중심을 잡지 못 하고 유행을 쫓아가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 달콤한 배려보다 분명한 의지로 신도들은 충분히 이해시키는 것이 옳은 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정법을 고수하면 그에 맞는 신도들이 모이게 되고 그것이 결국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을 모이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포교원을 잘 운영하는 방법을 묻더군요. 방법은 없어요. 하고자 하는 의지와 원칙만 있지요. 그리고 포교에 있어서 방법을 물어서는 안 됩니다. 나에게 유효한 방법이 다른 스님에게도 유효하지는 않아요.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관심입니다. 내가 신도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줄 것인지 계속해서 관심을 갖고 살펴야지요. 뜻이 있으면 마음은 열립니다.”
포교에 있어서도 특히 스님은 문화적인 부분과 어린이 포교에 많은 뜻을 두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어린이 포교의 전체를 관장하고 있는 사단법인 ‘동련’의 이사장을 맡고 있는 스님은 불교의 미래를 보기 때문일 것인데 아이들 얘기가 나오자 먼저 아이처럼 웃으며 말씀하신다.
“포교는 아이들이 친구한테 하듯 손 잡아주고 등 두드려주고 안아주고 말 한 마디 건네면 되는 거잖아요. 논리나 교리도 필요하겠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관심입니다.”
홍법사에는 ‘청소년 교육 연구소’가 있어 어린이 법회를 비롯해 수련회나 영어 템플스테이 그리고 어린이들이 배울 수 있는 각양각색의 많은 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영어, 과학, 원예, 플룻, 가야금 등 스무 개가 넘는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이 있고, 그것을 신도들 중 재능을 가진 분들이 맡아서 봉사해준다. 그러니 아이들도, 재능을 썩히고 있던 신도들도 좋아하는 경우다. 그렇게 해서 홍법사에 방학 때만 다녀가는 아이들만도 3600여명에 달한다. 불사를 하는 동안은 잠시 쉴 수밖에 없었는데 올해부터 다시 시작하기 위해 지역 아동 센터 허가를 받아놓은 상태라고 한다. 아이들이 가장 관심이 많은 것은 국제부. 영어 인터뷰를 통해 뽑은 어린이들이 한 달에 한번 국제부 행사에 자원봉사를 나가게 하는 것이다. 원어민을 한 달에 한번, 적어도 두 세 시간씩 만날 수 있고 아이들의 영어공부를 계속해서 점검하며 함께 해주고 있으니 아이들도 부모들도 좋아한다. 스님들이야말로 상황에 맞게 발 빠르게 움직이며 앞서 나가야 한다는 게 스님의 생각이다.
스님은 지난 해 대학생 신입생 환영회를 위해 직접 아이들의 밥을 사주기도 했다. 서울 경기지역의 아이들 50여명, 부산 지역 아이들 60여명. 백 명이 넘는 아이들을 일 년에 두 차례씩 호텔에서 밥을 사주며 이야기를 나눈다.
“어떻게 하면 어린이 포교를 잘 할 수 있냐고요? 제정의 1%만 어린이포교에 써도 성공합니다.”
지난 여름엔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와 연계해 아이들을 몽골로 봉사활동을 보냈다. 경비의 일부분을 절에서 지원해줬다. 그리고 올 겨울엔 대만의 불광산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하고 스키장도 가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이것도 아이들을 위해 절에서 많은 부분을 지원해 주기로 했다. 특히 이번엔 불광산사에서 운영하는 4개의 대학과 동국대학교가 자매결연을 맺게 되어 더 뜻 깊을 것이라 한다. 이것은 심산 스님이 2003년도부터 불광산사에서 하는 국제 불광회라는 모임에 계속 동참하고 신뢰를 쌓으면서 가능해진 일이었다. 이제 홍법사는 불광산사, 그리고 대만, 미국, 호주에 있는 4개의 대학과 교류할 수 있게 되었다며 스님은 그것이 홍법사 아이들에게 있어 무한한 꿈과 희망을 세계로 펼칠 수 있는 문이 열린 것이라 말씀하신다.
스님이 불교와 인연이 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불교학생회를 따라서 절에 갔는데 4월의 햇살과 단청과 나뭇잎이 어우러진 풍경이 그저 좋았다. 그러고는 신입생 환영 야회 법회가 있다고 해서 통도사에 따라갔다가 종법 스님의 법문을 듣게 되었다.
“그 때 내 눈에 비친 종범 스님은 너무도 멋있어서 동경심이 일었어요. 그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법문을 하셨는데 그 말씀과 함께 스님이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까지 마음을 흔들었지요.”
그리고 그 다음해 지안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출가에 뜻을 세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출가하겠다고 내장사로 갔는데, 그때 노 보살님들이 했던 얘기가 지금도 생생하단다.
“대통령 안 부러운 게 스님이라고 하시대요. 그때는 그 뜻을 머리로만 알았는데 30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 말이 느껴집니다. 인생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어요.”
그런 자유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스님들이 더욱 자기를 희생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도 잊지 않으신다.
“대만 불교를 보며 느끼는 게 있어요. 대만 불교는 신도를 위해 스님이 존재하는데, 한국은 스님을 위해 신도가 존재하지요.”
요즘 심산 스님이 마음에 품고 있는 글귀가 하나 있는데, 중국 본토의 진공 스님이 대만에 간 성운대사에게 보낸 편지글의 일부라고 한다.
“내가 불교 덕을 보려 하지 말고 불교가 내 덕을 보게 할 신심이 있어야 된다. 그 글귀를 읽는 순간 굉장히 크게 다가왔어요. 그 속에 모든 게 다 있더군요.”
나이가 들수록 존경을 받는 스님이야말로, 삭발 출가 했다는 사실만으로 안주하고 살면 불교의 덕을 볼 뿐이니 불교가 내 덕을 보게 할 신심으로 살기 위해 늘 마음에 이 글귀를 담고 살아간다 하신다. 이 글귀는 단지 스님에게만 해당 될 것은 아니지 않을까. 우리도 살면서 상대에게 덕을 받으려 하기보다 상대에게 덕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일 것이니.
스님의 원력은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취미 생활부터 신행 생활까지 아우르는 종합복지타운 같은 절을 설립하는 것이다. 그것이 스님의 마지막 꿈이라 하신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제 남은 기쁨은 아이들이 잘 되는 것 아니겠어요? 아이들 뒷바라지하며 사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 아니겠나 싶습니다.”
역시, 시골의 여염집에서나 들려옴직한 말씀이다. 늘 부모들에게서 듣던 그 말을 스님에게서 들으니 불쑥 집이 그리워졌다. 그래서일 것이다. 가끔은 이토록 시린 겨울이 좋다. 여름엔 느끼지 못하는, 따뜻한 밥과 아랫목과 시린 손을 비벼주는 어머니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 그래서 그날은 그토록 매섭던 눈보라가 견딜 만 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