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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대상으로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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續 선과 그림이야기 - 김현정 2010년 09월 343호
서화에서 고졸의 가치를 충분히 공감하고, 붓끝의 기교를 제일 꺼린 사람 중에 하나를 꼽자면 우리나라 조선 후기 대표적인 서화가인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이다.
그가 제주도로 귀양을 가던 길, 해남 대흥사에서 벌어진 일화가 있다. 당시 대흥사 대웅보전에는 원교체圓嶠體로 유명한 조선후기 서예가이자 양명학자인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현판이 걸려 있었다. 유배길 배를 타기 위해 대흥사에서 잠시 발을 멈춘 추사는 원교가 쓴 <대웅보전>이라는 현판을 보고는 글씨가 너무 기교에 넘친다고 하여 그 현판을 내리게 하고는 자신이 새로 현판을 써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긴 유배 생활을 마친 후 대흥사에 들러서는 원교의 글씨에 허물이 없다고 하면서 원래의 것을 다시 걸라고 했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여러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어려운 유배생활을 통해 추사의 까다로운 감식안이 부드러워졌던 것인지, 아니면 더러 겸손해진 것인지, 세상을 살아가는데 그가 생각했던 기교도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이라고 느꼈던 것인지 어느 쪽인지는 본인이 아닌 이상 알 수 없지만 졸拙과 교巧 사이의 거리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때 제주도 유배 중 나온 것이 그 유명한 세한도이다.
아무리 그가 서법을 중시하였고, 그 마음을 전하고자 뒤쪽으로 수많은 글을 적어 놓았다고는 하지만 세한도는 역시 그림으로 그의 뜻을 전한 작품이다. 논어論語에서 “날씨가 추워야 송백이 늦게 시드는 것을 알고, 난세가 된 후라야 군자의 지조를 안다(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 난세연후지군자지불개亂世然後知君子之不改)”라고 하는 구절에서 따와 제목을 붙였다. 추사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때가 59세(1844), 그야말로 환갑을 목전에 둔, 당시로서는 만만치 않은 나이였다. 추사선생이 활동하던 시기 조정은 당쟁으로 복잡하던 때이며 그 중심에 있던 그는 이미 여러 차례의 귀양을 경험했던 터였다. 지금도 다르지 않지만 조선 후기를 사는 정객에 있어 정치적 입장은 가끔은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삭풍이 불어치는 것과 같은 시절 당시 청나라에 가 있던 역관譯官 이상적(李尙迪;1804-1865)이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두 번이나 귀한 책을 구해 보내준 것에 대한 답례로 그린 것이 바로 이 세한도이다. 이 그림 뒤쪽에는 당시의 심정을 그린 장문長文의 자제自題가 붙어 있다. 크게 변하지 않은 한결같은 제자의 마음을 치켜 세우는데 지금의 안목으로 보자면 비교적 과한 면도 없지 않지만 얼마나 반갑고 고마웠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추사는 이상적의 마음을 추운 겨울에도 한결같은 소나무에 비유하여 칭찬한 것이다.
그림을 감상해보면 ‘세한도’라고 하는 그림의 제목을 앞에 달고 고목古木이 된 소나무 한 그루와 작은 집 주변에 곧고 푸른 소나무 셋을 그려 놓은 단순한 내용이 이 그림 구성의 전부이다. 이 간결한 그림을 그리는데 붓질을 화려하게 뽐내지도 않았고 먹의 농담(農談 ; 먹을 진하게 쓰거나 흐리게 하여 동세나 양감을 표현하는 것)조차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그림은 거칠고, 마르고 까칠하지만 그래서 담백하고 소박하다. 추사가 이 그림을 그릴 때에는 반가운 마음이 앞서 일사천리로 매우 빠르면서도 기개를 취하듯 강건하게 그렸던 흔적이 역력하다. 그림의 붓질 어느 한 곳 망설인 기색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운데 그려져 있는 집 한 채는 본인의 외로운 마음을 집약적으로 드러낸 대상이다. 그래서 이런 그림은 그림 속 사물을 통해 자신의 마음과 속뜻을 드러냈다고 하여 “사의화寫意畵”라고 분류하여 부른다. 물론 대부분의 동양의 그림, 그중에서도 선화는 사의화에 속하는 그림이다. 붓질과 그림의 내용을 통해 풍광의 아름다움 보다는 작가의 의중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림 속 대상들은 실제 모습과 꼭 같을 필요는 없다. 다만 어떻게 자신의 뜻을 그림이라는 기호로 잘 드러냈는가를 가작佳作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