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한 때 삶의 겨울이 지나고 나면 그 시기 누가 옆에 있어 덜 추웠던가, 알게 된다. 푸르른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한결같이 서 있던 얼굴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면 그제야 고마운 이들에게 마음을 표현하게 된다. 나는 나의 빈 마음을 함께 나눈 친구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한 친구는 회사에서 만난 ‘지안’선배이다. 나보다 나이가 많다. 그러나 시대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친구다. 선배는 디자이너 팀장이고 나는 편집자였다. 그런데 나는 일을 무리하게 해서 석 달 만에 퇴사를 했다. 한껏 기대했던 사회생활은 짧게 끝이 났고, 이는 내게 실패했다는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 선배는 그런 내 마음이 느껴졌는지 종종 연락을 해서 나를 다독이곤 했다.
“건강이 제일 중요해. 건강해야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첫 직장에서 1년은 일해야 한다! 그거 아니야. 정해진 건 없어.”
그러면서 우울한 나에게 자신의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괴로워하는 상대방을 위로하기 위해서 자신의 슬픈 일을 털어놓은 것이다. 내 마음도 아프게 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나를 변화시키려고 했다. 이전까지 나는 노력하는 대로 삶을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고, 직장과 학업, 취미 등 여러 분야의 계획을 세웠었다. 그런데 노력한대로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생각해 좌절했다. 한동안 낙담해했고, 그때마다 선배는 나의 성급함을 보며 여유를 가져보라고 충고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한 가지 이상의 힘겨움을 가지고 있다며. 나 혼자만 힘든 것은 아니라고, 설득했다. 그리고 기꺼이 내 우울함을 나눠가졌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도 자신의 마음을 나누는데 넉넉했다. 어느 날 거리를 걷는데, 동냥하는 할머니가 앉아계셨다. 저녁인데 바구니는 텅 비어있었다. 선배는 지갑에서 이천 원을 꺼내 넣었다. 돌아서서 걸으며 속상한 목소리로 ‘그래도 라면이라도 드셔야지’ 했다. 그냥 스쳐간 내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최근에는 한 할머니의 짐을 들어드렸는데, 할머니는 밖에 나오면 교통을 이용할 때 ‘집에나 계시지’ 등의 말에 위축이 되신단다. 그녀는 할머니를 위로하고, 노인에게 가하는 사회의 차가움을 안타까워했다.
선배는 모든 것은 ‘나’에게서 나온다고 했다. 그녀의 디자인은 자신에게서 출발한다. 나는 버스를 탈 때 턱 높이가 약자에 맞춰지면 모두들 편할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선배는 말했다. 우리도 몸이 힘들면 그 턱도 힘들어. 내가 나이가 들면 무릎도 아프고 다리도 아플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디자인을 하면 좋겠어. 사실 ‘약자’라는 기준도 어찌 보면 나의 편견일 것이다. 누가 그 범주에 포함되는가, 아닌가를 나누고 있으니 말이다. 다시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차별을 경계하고, 배려하는 디자인을 고민한다.
9월이면 선배는 영국으로 유학을 간다. 영국 대학원에 합격하고 하는 말이. “나 혼자서 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지금껏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열정적이고 치열하게 디자인을 선보일 것이다. 그것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세상을 밝게 비추리라 믿는다.
다른 친구는 고등학교 때 만난 ‘수영’이다. 입학식 날 나란히 줄을 섰고 짝꿍이 되었던 게 인연이 되었다. 친구는 많은 면에서 나와 달랐다. 지각이 잦았고, 수업시간에 졸기 일쑤였다. 걸음이 느린 편이어서 함께 걷다 보면 보조를 맞추기 힘들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의지가 약하고 게으르다고 생각했다. 식습관도 달라서 나는 밥, 친구는 빵을 좋아했다. 그럼에도 학습 성취도가 높고, 재주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친구가 잘 할 수 있는데, 최선을 다하지 않는 모습에 답답해하며 늘 훈계하는 말을 많이 했다. 친구가 어떠한 행동을 하면 나는 ‘그렇게 하면 안돼’라는 식이었다. 신기한 건 그때마다 친구는 늘 ‘맞아, 그건 내가 잘못했어.’하면서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상황을 긍정했는데, 특히나 내가 하려는 일을 늘 응원했다. 무엇을 시도하려고 하면 ‘넌 잘될거야.’ 용기를 주었다. 대학생이 되어 내가 사진에 관심을 가졌을 때, 친구의 부모님은 수동 카메라를 주셨다. 내가 사진을 찍게 된 건 친구 덕분이다. 사진은 세상을 보는 관점을 넓혀주었고, 그 과정에서 열정으로 빛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을 통해 꿈을 꾸었고, 삶을 가치 있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친구는 내가 절망에 가득 차 웃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매순간 내 삶을 밝게 보았다. 그림자가 짙은 만큼 햇살은 찬란하다고. 단지 시간이 걸리는 것뿐이라고. 아름다운 말들을 해주었다. 당장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도 목표로 향해가는 ‘과정’을 높이 보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이나 시간을 소중하게 여겼다.
최근에 우리는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나갔다. 나는 글을 써보려고 한다고 했다. 옆에서 친구는 “얘는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가 될거야”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몹시 부끄러웠다. 그런데 친구는 이런 이야기를 당연한 듯 말한다. 그때마다 강한 믿음을 느낀다. 만약 내가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하늘을 가리키며 ‘저기 별이 빛나고 있어’라고 하면 ‘나도 보여’하며 고개를 끄덕여줄 것 같다.
게으르게 여겼던 내 친구는 알람시계 여섯 개로 아침을 맞이한다. 잠이 많은 건 어쩔 수 없지만 출근하기 위해 때로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길들인다. 친구 집에서 아침에 그 시끄러운 알람소리를 들으며 친구가 위대하게 느껴졌다. 지난 날 내가 했던 걱정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일이었다는 것도 알았다. 어느 해부터인가 우리는 나란히 걸을 정도로 속도가 맞았고, 밥과 빵을 번갈아 먹는다.
소로우는 “월든”에서 우리가 서로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기적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그 시간 동안 세상의 모든 시대를, 모든 시대의 모든 세상을 살 수 있다고 했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보며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나눌 수 있는가? 나는 이 친구들과 괴로움, 꿈 그리고 열정을 나눴다. 자기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어 걸어가야 한다 해도 함께하는 이가 있어 내딛는 걸음이 가볍다. 나는 그들 마음이 쓸쓸한 어느 하루, 마주앉아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