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서울 길상사의 법당 양 옆으로 주황색 능소화가 만발 할 쯤 이었다. 길상사는 고찰은 아니지만 아기자기한 기품이 느껴지는 도심 속의 고요한 사찰이다. 그 곳에 영화학도인 내가 30명 내외의 스텝과 연기자를 이끌고 일주일 동안 길상사를 게릴라 군처럼 장악했었다, 이곳저곳을 옮겨가며, 소리 높여 ‘액션’을 외치며 촬영을 했다. 길상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자고로 영화 촬영이라는 것이 슛이 들어가는 순간 마다마다, 저기 길 건너 100m 밖의 옆 집 개까지도 \'묵언\'으로 숨죽여 도와줘야하는, 많은 분들의 협조와 인내가 요구되는 민폐의 예술이다. 그렇게 눈총과 격려로 만든 \'템플스테이\'라는 단편영화로 인해 길상사와 나의 시절인연이 닫았다. 촬영을 물신양면으로 도와주신 절분들의 배려에 내심 놀라고 있던 터라, 그 감사의 보답으로 작품이 끝나가는 지난 초겨울부터 길상사에서 작은 봉사를 시작했다. 길상사 주지, 덕현 스님의 상좌스님, 일월 스님(15)과 처월 스님(12)은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 이유야 물론 다르지만, 일종의 홈스터디 처럼 절에서 일반 스님들처럼 수행과 공부를 하며 지낸다. 그래 나는 이 두 스님들의 영어 공부를 맡게 되었다. 뒤늦게 대학원을 다니면서 학비 조달을 위해, 외부에서도 영어 과외를 종종 하는데, 그 때마다 느끼는 것은, 나이들은 어른들의 하나같은 말씀처럼, 요즘 어린 학생들은, 하나같이 아이 같은 순수한 면이 거의 없다. 인터넷과 TV를 통해 벌써부터 세상 돌아가는 일에 모르는 게 없고, 귀에 심히 거슬리는, 어른들을 흉내 낸 말투와, 여러 면에서 셈도 아주 빠르다.
스님들은 달랐다. 출가 한지 1년이 갓 넘은 일월스님(15)은 사춘기의 문턱을 넘고 계서서 그런지, 말을 할 때 항상 치야 교정중인 이가 보이지 않게 입을 꼭 다물고 수줍은 미소를 먼저 짓는다. 잠시 생각을 정리 한 후 답변을 내놓는데, 그 이야기들은 상대를 즐겁게 하고, 자못 차분하기까지 하다.
나이가 어린 처월스님(12)은, 귀염성이 많은 외모로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고, 단번에 마음을 녹여버리는 애교쟁이 이다. 저녁 예불 범종을 칠 때면, 작은 키로 매달리다시피 하여 열을 다해 치는데, 그 모습이 귀여워 여러 불자님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숙제를 못했을 경우에, 일월스님은 왜 못하게 됐는지 장황하게 차분히 설명을 한다면, 처월스님은 눈을 반짝이고 고개를 저으며, 어렵다고 애교를 부린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경계가 모호해졌다. 내가 스님들께 공부가르침 봉사를 하는 건지, 스님들이 팍팍한 세상에서 건조해진 내 심성에 물기를 적셔주고 있는 건지 말이다. 그렇듯 길상사에 스님들을 뵈러가는 길은 나의 가장 즐거운 일상 중에 하나가 되어있었다.
올 3월, 아직 봄소식은 저만치에 있고, 서울에 때 아닌 폭설로 길상사가 눈에 온통 잠긴 날, 절은 근심으로 더 가라않고 여기저기 눈물을 훔치는 분들이 보였다. 그러더니 다음 날 갑작스럽게 법정스님이 길상사 행지실로 오셨고, 입적하셨다. 절이 슬픔에 가라앉았다.
새벽예불 후 매일 병원으로 간병을 가시던 주지스님을 그날 아침 일주문에서 뵈었을 때도 예상하지 못한, 우리 모두가 마음의 준비할 시간이 부족한 비소였다. 그 후로 얼마동안 법정스님은 우리들 세상의 중심에 계셨다. 스님 생전의 일화나 남기신 가르침들이 사람들에게 어떤 \'social phenomenon 사회적 현상\'을 일으켜 이상고온으로 올 봄 세상이 유난히 뜨거울 때. 다행히 길상사 안쪽의 어린 스님들 처소만은 세상일과는 관계없이 평소처럼 조용하면서도 활기찬(?) 그대로였다. 안심이 되었다. 이 두 스님께 법정스님은 차를 권하고 좋은 말씀 해주시는 할아버지 같은, 노스님이었다.
한 달 뒤 봄의 전령사, 노란 영춘화가 한 아름 길상사에 피어, 드디어 봄이 찾아왔다. 저 멀리 남도에는 벚꽃, 산수유, 매화가 꽃사태를 이루고 있단다. 주지스님의 허락으로 나와 두 분 스님들은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이름하야 \'어른스님의 발자취여행\'이다.
카메라와 함께 하는 촬영이 우선시되는 일정이지만, 설레고 기대되었다. 그 마음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듯. 그 날 오전에 일정이 있어, 오후에 출발하기로 미리 약속이 되어있었는데도, 스님들은 아침 8시부터 얼른 오라고 전화를 다 하시더니, 점심공양 후부터는 아예 앉아 있지 못하고, 일주문에 나와 기다린 모양이다. 호기심으로 지나가는 신도 분들께는 \"저희 지리산가요. 쌍계사에 빨리 가서 정상까지 등산할 거예요.\"라고 하시면서. 도착해보니, 스님들은 본인들 몸집의 딱 절반만 한 큰 걸망을 메고, 눈까지 가려지는 큰 밀짚모자를 눌러 쓰고서도, 여행에 대한 설렘으로 얼굴가득 웃음꽃이 떠나지 않았다. 그 모습은 지금도 내 두 눈 속의 또 다른 눈에 그대로 새겨져있다.
그렇게 천지가 꽃으로 뒤덮인 봄에 제일 먼저 법정스님이 풋중시절에 은사 효봉스님을 모시고 안거한 지리산 쌍계사 탑전으로 떠났다. 하동의 화개장터부터 쌍계사 입구까지 10리 길에 벚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유난히 좋아하던 스님들은 지금도 그 길이 여행 중 가장 아름다웠다고 말한다.
그 다음은 조계산 송광사. 불일암으로 올라가는 대나무길에 붉은 동백이 아직 피어있었다. 불일암이 초행길인 일행을, 주지스님과 그곳에서 생활한 적이 있는 일월스님이 안내해 주었다. 막상 불일암에서는 법정스님이 가장 좋아했다던 ‘후박나무’가 어느 것인지 몰라 애를 먹었다. 원래 후박나무라는 상록수가 따로 있는데, 일부에서는 일본목련을 후박나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몰라 쉽게 찾지 못했다.
가로등이 없는 송광사의 밤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저녁공양 후 일행은 산책을 나갔다. 하늘은 잔별들로 가득했다. 서로 손을 잡고 하늘을 보고 걷는데, 스님들은 무서워하기는커녕 신나서 걸음을 재촉한다. 옆에서 걷던 처월스님이 ‘밤하늘 가득 별이 찬, 이런 곳에서 매일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문득 이 어린 스님들이 이 번 생이 첫 출가가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또 머리를 스쳤다.
통영 미륵산의 미래사는 어른(법정)스님의 ‘삭발본사’이다. 아담하면서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일정이 바빠서 미륵부처님을 못 뵙고 왔는데, 스님들이 여행 중 처음으로 미간에 주름을 지었다.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가야산의 해인사. 어른 스님이 12년 동안 계시면서 강원시절, 번역작업, 퇴설당에서 안거를 한 곳이다. ‘홀로 살 수 있었던 저력은, 장경각 법보전에서 주석으로 기도하던 그 힘이었다.’는 글귀가 떠올랐다. 큰 법당에서 대중예불이 끝난 후 혼자 장경각에 올라가 백팔 배를 드리면서 기도하는 일로 그날의 정신적인 양식을 마련했다고 하셨다. 퇴설당과 법보전에서 두 스님들이 예전의 어른스님이 그러했듯이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여행의 모든 일정을 마쳤다.
물론 이번 여행은 법정스님의 영상 기록물의 한 페이지를 담기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카메라가 켜져 있지 않을 때도, 일행은 즐거웠고 무언가를 보았고 함께 느꼈다. 두 분 스님들과 함께한 지난봄은 잊지 못 할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서울에 돌아와서도 도심 길가의 무심히 핀 꽃을 보아도 스님들과 함께 본 남도의 꽃의 향기가 어른거려 유달리 가는 봄이 서운했다. 조금 서럽기까지 했다.
이번 여름 하안거에 두 분 스님들은 아직 세상의 관심이 쏠린 길상사를 떠나 영북의 원적사에서 안거중이다. 여름 자연에서 하얀 이 드러내며, 얼굴 그을리게 뛰어다닐 스님들의 모습이 선하다.
여여하시리라 믿는다.
언젠가는 스님들과 나의 시절인연이 다하는 날이 오리라.
그래서 이 순간이 더 소중한 것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