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수묵화水墨畵를 잠시 배운 적이 있다. 대학 시절, 붓글씨와 전각을 배우면서 언젠가는 수묵화를 그려봐야지 하는 오래된 염원이 실현된 순간이었다.
수묵화의 기본인 난초 그리기를 배우면서, 필자는 그림 그리기가 선禪수행과 다름 없음을 느낄 수 있었다. ‘24시간 내내 하나의 망상도 짓지 말라(십이시중十二時中 부작일물不作一物)’고 하는 게송에 따르면 생활 자체가 참선 아닌 것이 없지만, 붓으로 난蘭을 치면서 더욱 묘한 선미禪味를 맛볼 수 있었다.
가느다란 난초 잎을 그려나가면서 필자는 ‘내가 잘 그려야지’하는 생각이 개입하는 한 그림을 잘 그릴 수 없음을 알았다. 오히려 ‘내가’라는 아상我相, ‘잘 그려야지’하는 치구심馳驅心 없이 자연스럽게 그리다 보면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아름다운 난 그림이 완성되곤 했던 것이다.
수묵화 작업이 잘 될 때는 그림 그리는 과정 자체가 ‘나’와 ‘내가 그린다’는 생각 없이 도화지 위에 붓이 무심하게 흔적을 남기며 흘러가기만 한다. 그야말로 무아無我의 상태에서 붓은 자동적으로 도화지 위를 움직이며 하나의 수묵화를 완성하게 된다. 이 때 ‘나’라고 하는 에고(ego)는 사라져 ‘무無’의 빈 그릇이 되고, 그 ‘무’속에서 눈이 보는 것들은 저절로 거기에 채워지기만 할 뿐이다. 잡다한 생각이 개입하지 않는 그 활짝 깨어있는 순간에 화가가 그리는 대나무 한 그루가 곧 공안이 되고, 화가는 그 공안 속으로 송두리째 빨려들어가곤 하는 것이다.
수묵화를 그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 보는 일과 투명한 마음을 갖는 일이다. 물론 두 가지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바깥도 조용하고 안도 조용해서 다 같이 맑아야 한다. 자기를 완전히 비워내고, 비 개인 날의 아침처럼 먼지 하나 끼지 않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볼 때 멋진 그림이 그려진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바르게 볼 때, 즉 여실지견如實知見이 가능할 때 비로소 ‘보는 자’는 보고 있는 대상과 하나가 된다. 바르게 보는 일이 곧 깨달음의 문을 여는 관문인 셈이다.
그림을 그릴 때, 어떻게 그려야 한다는 판단이나 생각, 잔재주는 필요 없다. 단지 맑게 보고, 보는 바에 따라 붓이 움직이게 한다. 식물의 이파리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나게 하는 데 묘함이 있다.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보고 그리기는 자연을 베끼는 일과는 다르다. 단지 활짝 깨어서 자연과 만나 하나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자신의 모습을 그리도록 하는 차원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림 그리기의 극치에 이르면, 앞에 있는 대상의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 곧 화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길과 다름 없다. 석상경저 선사가 “여기 우리들 모든 존재의 본래 얼굴(본래면목本來面目)인 꾸밈없는 속알맹이가 드러나 있다 … 여기 꾸밈없고 더없이 아름다운 이 풍경속에서 그대는 태어났다”고 하는 법문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영운지근 선사가 복사꽃을 보는 순간, 본래심을 깨달은 기연에서 엿볼 수 있듯이, 사물을 보는 것은 사실, 스스로의 마음을 본 것이다. 이에 대해 《종경록》은 다음과 같은 해설을 하고 있다.
“삼계는 오직 마음뿐이다. 경전(불설법구경)에 말씀하였다. ‘삼라만상은 한 법(일심一心)으로 나툰 것이다.’라고. 대개 색色을 본다고 하는 것은 모두 이 마음이 보는 것이다. 마음은 스스로 마음이라고 할 수 없고, 색에 인연한 마음이며, 색은 스스로 색이라고 할 수 없고, 마음에 인연한 색인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 말씀하시길, ‘견색見色은 곧 견심見心이다’라고 했다.”
이와 같이 ‘견색이 곧 견심’이라 하는 것은 마음에 보는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禪에서는 마음의 비춰보는 성질을 거울에 비유해 명경明鏡이나 고경古鏡으로 비유해 왔다. 특히 ‘빛을 돌이켜 거꾸로 비추라’는 뜻의 ‘회광반조回光返照’라는 말은 가장 널리 쓰이는 전문용어이기도 하다. 언어나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마음 속의 각성覺性을 직시하는 것을 의미하는 회광반조는 지금까지 수동적으로 비추던 마음이 스스로 비출 수 있는 힘을 되찾아서 비춘 것을 되비치는 작용을 의미한다. 즉 형상 없는 ‘마음 거울’은 붉은 것이 오면 붉은 것을 비추고, 푸른 것이 오면 푸른 것을 그대로 비춤으로써, 본래의 심성이 반조返照되어 드러난다는 것이다.
결국, 화가가 사물을 보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마음이 마음을 보고 마음을 그리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이와 관련, 마조 대사는 《마조록》에서 “그러므로 3계가 오직 마음일 뿐삼계유심三界唯心이며, 삼라만상이 한 법에서 나온(인印) 것이다. 형상(색色)을 볼 때, 그것은 모두 마음을 보는 것인데, 마음은 그 자체가 마음이 아니라 형상을 의지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힌트를 주었다.
《화엄경》 ‘야마천궁보살설게품’ 에서 각림 보살은 좀더 구체적으로 일체를 창조하는 마음을 화가에 비유해 설명하고 있다.
“그림 그리는 화가가 자기의 마음은 알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이 모든 법의 성품도 그러합니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간을 그려내나니, 오온이 마음따라 생기어서 무슨 법이나 짓지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러한 이치를 알고 그림을 그린다면, 그림 그리는 작업 그대로가 본래부처의 방광放光임을 알게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과거 현재 미래의 일체 부처님을 알려면 마땅히 법계의 성품이 모두가 마음으로 된 줄을 보아야 한다(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體唯心造)”는 《화엄경》 4구게를 실감하면서 무심으로 그림 그리는 작업에 임한다면, 어떤 소재와 도구로 그림을 그리든 그것은 무아의 본래심本來心으로 그린 그림, 즉 선화禪畵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