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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추억을 간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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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이야기 - 류미화/해인사종무원 2010년 04월 338호
만지면 노란물이 묻어날것 같은 복수초가 피더니 산수유가 구름같은 꽃을 피우고 바람은 둥굴어지고… 눈은 계속 바깥으로만 향한다.
봄인가 보다.
이로써 나는 해인사에서 4개의 계절을 다 맞이하게 된다.
가방하나 덜덜 끌고 해인사에 처음 들어섰을 때는 과연 여기서 사계절이나 맞이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과 해인사에서 오래 살고 싶다는 희망으로 마음이 복잡했었다.

공양하러 공양간에 들어섰을 때 가득 앉아계시는 스님들을 보고 놀라고(사실 이렇게 많은 스님들이 한 자리에 계시는 것을 처음 보았으므로), 바로 눈 뜬 부스스한 모습으로 공양하러 갈 수 없어 아침을 굶었더니 오후가 되면 목구멍에서 손이(?) 나올 정도로 배가 고팠다.
마을에 내려가면 먹을 것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나의 이런 불쌍한 사정을 눈치 챈 스님께서 먹을 것을 부지런히 날라다 주시기 전까진 체중이 2㎏ 가까이나 내려가기도 했다.
하지만 기와막에서 맞는 여름 아침의 고즈넉한 정경, 어느날 저녁 산책길에서 섬광같이 다가온 향기에 화들짝 놀라면서 발견한 노각나무의 화려하지만 청초한 꽃.
오후의 햇살을 받은 불꽃 덩어리 같았던 가야산의 봉우리들…
피 빛보다 더 붉은색은 저런 색일까 싶었던 단풍나무 잎, 끝날 것 같지 않아 나중에는 질려버린 해인사의 눈,
이런것들이 있어 나의 생활은 행복했던 것 같다.
그래도 지난 시간 동안 나에게 가장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던 것은 아무래도 기도하러 오신 보살님들이었다. 모든 보살님들이 다 좋기는 했지만 아주 선명하게 기억되는 몇 분의 보살님들이 계신다.
끔찍한 사고로 자식을 잃고 몇 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실제로 자꾸 눈에 보인다고 천도재를 올리려 오셨던 보살님…
슬픔이 몸을 망가뜨려서 조그마한 흥분에도 숨을 쉴 수도 걸을 수도 없는 분이었다.
그날도 이야기 도중에 감정이 격해져서 결국 내 방으로 모셔와야만 했다. 계속 울면서 집에 돌아가신 뒤에도 가끔씩 통화하고 말씀도 들어 드렸더니 몇 달 뒤에는 몰라보게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오셔서 감사하다고, 이제는 이겨낼 수 있을 것 같고 자식도 좋은 곳으로 갔는 것 같다고 좋아하셨다. 빨리 마음을 회복하고 좋은 인연을 다시 만났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또 한분의 보살님. 지난 가을쯤에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받자마자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온갖 노력 끝에 5년만에 애기를 가졌는데 심장, 폐 등 여러군데가 안 좋은 상태의 미숙아로 태어났단다. 인큐베이터에서 자라던 중 심장이 갑자기 더 나빠져서 내일 수술를 해야 하니까 기도를 올려달라고, 울먹이던 목소리는 급기야 격한 울음으로 바뀌었고 전화를 받는 나도 황망하기는 매 한가지였다.
울지 말고, 강한 마음으로 애기에게 용기를 주고, 해인사의 부처님을 믿어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나도 간절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축원장을 법당에 올려드렸다.
그 후에도 오랫동안 마음에 걸리고 애기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겁이 나서 감히 전화를 해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 올 1월에 겨우 용기를 내어 전화해 보았더니 수술이 잘 되어서 퇴원했고, 지금 애기 젖 먹이면서 전화 받고 있다고 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목이 메이는 느낌이었고, 애기 나으면 꼭 해인사 부처님을 찾아뵈러 가겠다는 약속대로, 곧 해인사에 오시겠다는 말씀에, 지금은 아직 추우니까 날씨 풀리면 오시라고 하고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동안 진정할 수가 없었다.
아, 부처님 감사합니다.
애기야, 태어나자마자 너도 고생하고, 부모님 마음도 그렇게 아프게 했으니, 이제는 부처님 법 안에서 밝고 건강하게만 자라렴.

그 외에도 어긋난 인연 때문에 혼자 늙어 가시는 초로의 보살님.
그 분은 미인도를 연상케 할 만큼 고왔고, 행동도 조선시대의 양반집 규수 만큼이나 조신한 분이셨다. 눈물까지도…

그리고 무언가 따지러 접수실에 오셨다가 화가 풀리신 뒤에는 봄바람처럼 다정해 지셨던 노 보살님. 내가 그만둔다는 말에 눈물까지 보이시면서 돌아가셨던 노 보살님.
앞으로 한참은 보살님들이 보고 싶을 것 같다.

이제 해인사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난 내가 있는 자리에서 진실했던가.
나를 저버리는 행동은 하지 않았던가.
사람에게 최선을 다 했는가.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지금의 시간들이 후회로 남지 않겠는가.
예! 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랄뿐이다.
결국 나는 해인사에서 4개의 계절을 다 경험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