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해인사에 가 있는데, 편집장 종현스님께서 그러신다.
“나의 행자시절 연재가 끝났는데 소감 한 마디 해야죠. ‘호계삼소’와 함께 해인지 간판 연재였는데.. ”
‘해인 海印’에 ‘나의 행자시절’을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 1996년 9월이었다. 그 동안 참 많은 절들을 다니면서 수행자분들을 만나 뵈었다. 맑고 청정한 스님들을 뵙고 아름다운 출가이야기, 뜨거운 삶의 이야기를 들 을 수 이었던 청복의 순례길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취재를 다녔으니까 12년 간 150여 분의 스님을 만난 셈이다.
행자시절을 쓰고 5년 쯤 되었을 때 그간 쓴 것을 묶어 단행본으로 냈고, 다시 지난 해 두 권을 더 출판했다. 그때 여러분들이 ‘나의 행자시절’이란 제목만을 보고 나에게 ‘언제 출가했었느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야말로 내 개인의 행자시절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때 생각했었다. 하,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하고.
행자시절.
출가의 길에서 가장 풋풋하고 맑은 초발심시절이어서 출가자 누구나 고향처럼 그리워하는 시절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많은 분들이 어떻게 해서 해인지에 행자시절을 싣기 시작했느냐고 궁금해 했다. 해인지 편집위원으로 계신 현진스님의 발의였다고 들었다. 역시 글을 잘 쓰고 아이디어가 많은 분다운 생각이었다.
해인지와 나와의 인연은 행자시절 연재보다 더 거슬러 올라 가 1991년 호계삼소를 쓰던 때부터 시작된다. 거의 이십 여 년에 가까운 인연이다 보니, 현진스님은 이제 나를 ‘장모급보살’이라고 부른다. 해인지와 함께 삼십대 중반에서 사십대를 거쳐 오십대에 이르렀으니 그럴만도 하다. 해인지와의 인연은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한 인연이다.
선명히 떠오른다. 행자시절을 첫 취재하기 위해 퇴설당으로 지금 종정이신 법전스님을 찾아뵈었던 일이. 당시 스님께선 해인총림 방장으로 추대되셔서 퇴설당에 계실 때였다. 그 맑고 정갈한 퇴설당에 쏟아져내리던 밝은 빛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넓은 퇴설당에 조용히 서 계셨던 노수행자의 모습이 종정스님에 대한 첫 기억이다. 함께 간 편집장 성전스님이 행자시절의 취재의 취지를 말씀드리자, 잠시 묵묵하시더니 ‘다음 기회에 하지..’ 하시면서 사양하셨다. 아쉬움으로 물러나온 지 7년 만에 행자시절이 아닌, 큰스님의 수행기를 쓰기 위해 다시 찾아뵈었는데, 그때 큰스님의 행자시절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단명할 사주여서 열네 살에 백양사 청류암에 맡겨져 3년간 행자시절을 보내게 되셨는데, 부모님이 보고 싶어서 하루에도 몇 차례씩이나 산등성이 올라 부모님을 기다리다가 울면서 돌아서셨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기억이 남는다.
종정스님께 퇴자를 맞고 찾아뵌 분이 해인사 극락전에 계셨던 도견스님이다. 그러니까 도견스님이 나의 행자시절 연재 첫 테이프를 끊으신 셈이다. 해인사 주지를 지내셨고 종정스님과 갑장이신 도견스님은 오대산에서 출가하신 이야기, 스승 지월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셨다. 노수행자께서 얼마나 극진히 스승을 추억하시는지, 지월스님이라는 수행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후로도 해인사에서 출가하신 여러 스님께 지월스님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렇게 나의 행자시절과 함께 한 세월들은, 이 땅의 불교에 생명을 불어넣었던 역사 속 수행자분들과의 만남이기도 했다. 지금도 해인사에 갈 때면 산행을 하고 돌아가시는 도견스님을 뵙게 된다. 허리가 너무 많이 굽으신 것을 보면서 제행무상에 대한 공부를 한다.
연재 초기엔 노스님들을 주로 취재했기 때문에 그간 많은 분들이 입적하셨다. 석주노스님, 운경노스님, 장일스님, 고봉스님, 탄성스님, 상륜스님, 종성스님, 범룡스님 등등... 속가에 대한 이야기를 잘못 썼다고 화를 내셨던 석주노스님(얼마나 무안했던가. 그런데 그 무안하고 서운했던 마음이 글을 쓰는 데 조심하게 만들었으니, 큰 가르치심이었다), 출가해서 육이오 동란을 겪으면서 파란만장했던 가족사를 이야기하시며 눈물지으셨던 운경노스님.
동화사 내원암에 계셨던 장일노스님은 생전에 두 번 뵈었다. 낮에 시작된 인터뷰가 자정 가까이까지 계속되었던 분이다. 한국의 근현대 비구니사라고 할 만큼 스님의 출가와 수행이력은 극적이고 역동적이었다. 말씀 속에 등장했던 수많은 선지식들과의 만남과 수행, 그것은 곧 이 땅의 불교사이기도 했다. 행자시절을 취재하고 다음해 입적하셨다. 살아계실 때 보충, 취재해서 일대기를 엮었더라면 한국 불교사에 귀한 자료가 되었을 것이다.
탄성스님. 스님께서 보여주신 하심의 아름다운 모습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깊은 수행에서 우러나왔을 하심의 모습은 수행이 사람을 얼마나 아름답게 하는가를 몸소 보여주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총무원장 하실 때 조계사에서 인터뷰하면서 한 번, 공림사에서 행자시절로 한 번 그렇게 딱 두 번 뵈었는데도 그분이 내게 남기신 향훈은 잊을 수 없다.
스님들의 행자시절 이야기는 초발심시절의 행자시절 이야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때로는 행자시절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살아오신 이야기 전부를 들려주시기도 했고,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이야기를 들려주시기도 했다.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는 나는 한 번 앉으면 일어날 줄 모르는데, 함께 갔던 편집장스님에게 ‘뭘 그렇게 오래 들어요?’ 하는 소리를 들은 적도 여러 번 있다.
가끔 아이들을 데리고 취재를 갔는데 오랜 취재가 지루했던지, ‘엄마 빨리 가!’ 하고 쪽지를 보냈던 어린 딸이 어느덧 고등학교에 다닌다. 그때 사만코아이스크림을 냉장고에서 꺼내주시며 달랬던 분이 지금 해인사 원로이신 정원스님이시다.
행자시절을 취재하면서 가장 큰 가르침을 받은 분은 지금 범어사에 계신 무비스님이다. 다른 일로 부산에 가 있다가 문득 날짜를 보니 행자시절 원고 마감이 다가오고 있었다. 부산에 계신 스님들을 취재 대상으로 놓고 생각하다가 범어사 무비스님을 찾아뵙기로 하고 전화를 드렸다. 큰 수술을 받으시고 막 절로 돌아오셨을 때라서 퍽 조심스러웠는데, 스님께선 흔쾌히 취재에 응해주셨다. 취재를 끝내고 일어서면서 감사한 말씀을 드리는 나에게 하셨던 말씀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앓고 일어나니, 언제나 지금 이 시간, 몸도 마음도 충분히 써야겠다는 생각이 듭디다.”
수처작주隨處作酒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순간이었고, 그 때 의자에서 육척거구의 불편한 몸을 일으키시면서 하셨던 그 말씀은 내가 살아가는 데 더할 수 없이 귀한 가르침이 되었다.
취재하면서 방문했던 수많은 절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지리산 자락의 연암이다. 그간 내가 본 암자 가운데 가장 작은 토굴인데,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지리산이 물결처럼 펼쳐있던 그 작은 토굴 툇마루에서 스님의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세 평짜리 작은 토굴이지만 세상을 다 품은 듯 넉넉하셨던 도현스님께서 해주신 말씀도 가슴에 담아두고 있다.
“삶에서 자신이 주인이 되려면 자신에게 닥친 현 상활을 즐기는 겁니다. 그러려면 항상 자신을 관조해야 합니다. 자신을 수시로 비춰보는 일에 깨어 있지 않으면 삶에서 주인 노릇을 할 수 없죠.”
오대산 월정사 지장암으로 출가하신 뇌묵스님(월정사 육수암 선원장)은 팔순이 넘은 연세에도 얼마나 성격이 밝고 당당하신지 뵙고 있는 동안 행복했던 분이다.
“한바탕 꿈꾸다 가는 세상, 아옹다옹 불평불만 늘어놓고 살 것 있는가. 내게 허물이 없으면 남의 허물도 보이지 않는 법, 항상 부드럽고 선하고 어질게 살면 된다. 인과를 믿으면 모든 것이 그 자리에 있고 모두가 편안하다. 그것이 또한 불법이다.”
참 오랜 동안 행자시절과 함께 했는데, 쓰고 보니 연재를 마감하면서 쓴 글이 너무 두서 없다. 마지막으로 작년에 그간 쓴 글을 모아 세권의 책을 내면서 ‘엮은이의 말’에 썼던 글로 해인지와의 오랜 인연에 대한 감사함을 대신한다.
“십년 넘게 행자시절을 위재하고 글을 쓰면서 어느덧 출가를 동경하게 되었고 수행을 사랑하게 되었다.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일이 수행에 있음을 확인했고 수행한 만큼 불성에 다가간다는 것을 확신했다. 삶의 우선 순위를 두는 수행에 두는 신심 깊은 불자로 거듭날 수 있었으니, 오랜 시간 스님들의 행자시절을 함께 하면서 얻은 크나큰 공덕이다. 한량없는 불은에 합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