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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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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 피플 - 이겸 2009년 08월 330호
스님 무엇이 시작입니까? 율을 지키고 따르는 것이지요! 경남 산청군 산청읍 내리와 삼장면 홍계리, 단성면 청계리 경계를 이루는 ‘웅석봉熊石峰’은
높이 1,099m로 ‘웅석산’이라고도 한다. 꼭대기가 곰같이 생겼다 하여 이러한 붙여진 이름이다. 산세가 험한 이곳 봉우리 아래 심적사가 있다. 장마 기간이라 그런지 계곡의 물소리가 요란하다. 가파르게 떨어지는 물소리가 절 마당을 가득 메울 정도이다. 심적사의 첫인상은 호방한 느낌을 준다. 산세 또한 거칠 것 없이 시원스레 트였다. 저 만치 후원에선 수확한 고추를 손질하는 손길이 분주해 보인다. 법당에 들어서니 곳곳에 세심하게 배려한 손길이 느껴진다. 밝고 정갈하여 언제 까지고 머물고 싶다. 대웅보전 계단 아래엔 연꽃이 곱게 피어 반긴다. 그 빛이 어찌나 곱던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기척을 느낀 스님이 반갑게 맞이한다. 연꽃을 사이에 두고.......
정기적으로 절집을 드나들다 보니 가끔은 변화를 피부로 느낀다. 여러 채의 전각들이 늘어선 산중 사찰에 들어서면 그 규모에 걸맞지 않게 매우 적막한 분위기를 느낄 때가 있다. 전각의 규모에 비해 그 곳에 머무는 이들이 극히 적기 때문이다. 때론 절집을 지키는 견공만 보고 오는 경우도 있다. 불사의 진행 속도보다 절집을 찾는 이들이 더 빠르게 줄어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노파심이 자주 든다. 마치 큰 그릇에 담긴 물 몇 방울을 보는 듯해서이다. 하지만 심적사에선 이러한 노파심이 자취를 감춘다. 스님들과 신도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경내를 가로 지른다. 조용하고도 일사분란하다. 대웅보전 처마 밑에 서니, 멀리 바라보이는 풍경이 끝없이 이어진다. 탁 트인 시야가 펼쳐진다. 거기엔 걸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장마구름 밀려와 앞을 메우니 고봉들이 숨죽인다. 그 넓던 시야가 더욱 넓어진다. 비교 할 수 없는 공간이 다시 만들어 진다. 안개구름이 모든 공간을 하나로 만들어 버린다. 절벽의 경계도 사라져 모든 것이 허공이다. 허공에 속에 ‘심적사’가 있었다.
현재 심적사는 비구니 스님들이 지키고 있다. 심적사의 창건에 관하여는 산청문화원에서 펴낸 『산청지명고(山淸地名考)』나 『산청향맥(山淸鄕脈)』을 보면 신라 경순왕 3년(929)에 창건하여 인조 7년(1630) 에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반면 홍유스님의「산음심적암기(山陰深寂庵記)」의 기록에는 광해군 2년(1610) 운일스님의 심적암 창건 이후 설암(雪巖), 이암(怡巖), 설봉(雪峰) 스님 등의 중건과 중수를 밝히는 기록 또한 존재한다. 산청읍 지리의 ‘심적정사’ 나한전의 석조 나한상(石造 羅漢像)은 원래 산청읍(山淸邑) 지리(池里) 1128번지 소재 ‘나한암羅漢庵’에 봉안하였던 것을 6.25동란으로 ‘나한암’이 소실되자 1950년경 동봉 스님이 나한전 석불상을 삼봉산 희룡동으로 옮겨 놓았으나, 석불상을 봉안할 별전이 없던 중에 1976년에 산청읍 지리의 현재 위치에 새로 절을 지어 석불상을 다시 모시기 시작하였다. 이곳이 지금의 ‘심적정사’가 되었다. 이때 모셔진 ‘심적사 나한전석불상深寂寺羅漢殿石佛像’은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10호로 지정되어 심적사로 돌아오지 못하고 심적정사에 그대로 봉안되어 있다. 심적정사의 나한전 안에는 16나한상을 포함한 26구의 불상이 모셔져 있으며, 석불상 모두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나한전(羅漢殿)의 주불(主佛) 1구와 협시보살(脇侍菩薩) 1구, 나한상(羅漢像) 15구, 신장상(神將像) 2구, 기타(其他) 2구로 모두 21구의 석조불상(石造佛像)으로서 본래(本來) 도금(鍍金)이나 도색(塗色)을 하지 아니한 원석질감(原石質感)의 상태이며, 원석은 반짝이는 금은모래가 썩여있어 재질이라서 빛을 비추면 아름답게 빛이 난다. 각각 크기는 다음과 같다. 주불상(主佛像)은 높이 42㎝, 협시보살상(脇侍菩薩像)은 높이 29㎝, 나한상(羅漢像)은 높이 26㎝, 신장상(神將像)은 높이 34.5㎝, 기타는 높이 26㎝이다. 한편 심적사는 1991년 복원 불사가 이루어지면서 2006년 새로이 오백나한상을 조성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