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鄭聲의 개념에 대한 논란과 선의 회광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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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샘 - 김계유
2009년 08월 330호
예로부터 정성이란 나라의 이름에 해당하는 개념만으로 보지 않았다. 그보다도 손을 번잡스레 놀리고 소리를 음탕하게 내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설명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 근거로 황제내경의 소문편에서 말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성호는 주목한다.
“병에 걸려 허한 사람이 말을 거듭하는 것을 정성鄭聲이라 한다”는 구절이다.
정나라의 음악을 난세의 풍류라고 의심한 동기는 한나라의 유향이 지은 오경통의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그곳의 본문 가운데서 정중한 소리는 사람을 음탕하게 만든다고 하였다. 유향이 여기서 말하는 정중한 소리란 다름 아닌 정나라 음악을 말한다는 게 그간 많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해석이었다.
공자도 논어의 위령공편에서 “정성鄭聲은 음란하고 영인은 위태롭다” 하였다.
그렇다면 공자가 위령공편에서 말하는 정성은 과연 어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을까. 예기에 따르면 정나라와 위나라의 음악은 어지러운 세상의 소리이고 상간 복상의 마음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망국의 풍류라고 했으니 공자의 뜻은 분명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이들 망국과 난세의 소리와 풍류, 혹 그 비롯하는 실마리는 한결같이 성적인 측면의 문란함이 극도에 이르면서 생겨난다. 곧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본분을 상실하고 눈앞의 쾌락만을 지나치게 추구하면서 생겨나는 하나의 폐단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도를 문제삼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정성의 개념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정리 되어야 하는가 보다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가에서 그 의미들이 활용되어져야 함을 알 수가 있다. 선에서 말하는 회광반조의 논리다. 세상이 어떻게 보여지느냐가 아닌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의 문제다. 내가 만약 눈 앞의 쾌락만을 위해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음탕한 색깔의 정성에 해당하는 객관적인 개념에 사로잡힌 모습이 된다. 하긴 정성으로 분류되는 소리 뿐이겠는가?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세상의 경계가 그점에 있어서는 한결같다.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空도리로 전체 경전의 핵심적인 뼈대를 삼는다.
이를테면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와 같은 사구게四句偈다. 어떤 맥락에서인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의미에 대한 진제와 구마라즙의 해석상 차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론종 계통의 진제입장에서는 제상諸相과 비상非相의 의미를 각각 독립적으로 취급하여 모든 형상과 형상 아님을 본다고 하면 그것이 여래를 보는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구마라즙은 모든 형상이 형상 아님을 본다고 하면 그것이 곧 여래를 보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여기서 그 설명의 핵심을 되짚어보면 진제와 구마라즙의 견해는 어떤 면에서는 서로 일치하고 어떤 면에서는 서로 어긋난다. 다시 말해 앞의 제상諸相을 현실적인 의미의 형상으로 보는 점에서는 두 사람이 일치하지만 비상非相의 의미에 있어서는 서로 견해를 달리한다.
앞의 진제가 非相을 현실적인 모양의 여러 형상이 근거하는 불성에 주목하는 입장이라면 구마라즙은 사물에 대한 일상적인 감각을 부정하는 의미로 非相의 견해를 취한다.
예를 들어보자 물이나 비 구름 및 안개는 수소 두 분자와 산소 한 분자가 결합된 서로 다른 모양의 현실적인 구성체라는 점에서 그 성격이 서로 같지만 또한 다르다.
진제는 이 둘의 형태를 놓고 물이나 안개의 형상이 바로 諸相이라면 非相은 수소 두 분자와 산소 한분자의 측면이 강조된 문구라고 그 뜻을 풀고 싶어 한다. 그러나 구마라즙은 물이나 안개라는 구체적인 형상이 바로 諸相이라는 시각에는 동의하지만 非相의 의미는 진제와 다르게 바라본다. 물은 물이 아니고 안개는 안개가 아니라는 시각인 것이다.
두 사람의 차이점은 어디에 있을까.
진제가 모든 사물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는 일체법의 본질을 모든 사물에 대한 일상적인 관심과 함께 말하고 싶어 했다면 구마라즙은 철저히 우리의 사물에 대한 느낌을 부정하는 쪽이다. 그것은 감각적이고 비본질적이라는 입장이다.
이해를 돕고자 다음과 같은 한 토막의 구체적인 일화라면 어떨까?
어떤 이가 화가를 청해 한 폭의 대나무를 그리게 했다.
그 사람은 화가의 그림을 두고 훌륭하다고 치켜세운 뒤 그림은 좋지만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붉은 색이 아니라 검은 색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그림을 그린 화가는 세상 어디에서 당신이 말하는 색의 검은 대를 볼 수 있겠느냐며 반발하며 그곳을 떠나갔다. 이 두 사람의 생각을 놓고 진제와 구마라즙이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당연히 구마라즙이라면 ‘허 그 사람들 자기 자신의 대나무에 대한 관념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군.’하며 혀를 찰 것이고, 진제라면
‘그림의 색깔이야 어떻든 그 자체에서 대나무의 본질을 함께 볼 수 있었어야 할텐데’
라고 아쉬워했을 것이다. 진제가 현상 그대로에 입각한 본질 지향형이라면 구마라즙은 철저히 우리의 관념으로 나타난 감각을 부정하고자 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동양 종교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우리는 흔히 종교를 신과 인간의 결합관계로 바라볼 뿐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어떤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는 성찰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비중을 두어 생각하지를 않는다.
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그리고 바로 여기에 서두에서 문제삼아 본 정성의 개념에 대한 구도 차원의 본질적인 의미 문제가 반영되어 있다. 이는 달리 말해 진리를 추구하는 자에게 진리의 핵심은 정성의 개념이나 상간·복상의 풍류 등과 같이 객관적인 사물의 법칙이나 개념 문제가 아닌 자신의 안목에 관한 성찰의 문제다. 마치 선가구감에서 언급하듯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하는 가르침으로 통하는.
그러므로 우리는 경전을 독송하고 절을 찾아다니면서도 그 출발은 항상 회광반조의 형태로 구체적이어야만 한다. 무엇이 정성이며 객관적인 세계의 진리인가가 아니라 내게 있어서는 그 개념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하는가를 되새겨보아야 하는. 그리고 여기에 세상의 지식이 지식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만드는 열쇠도 있지 않을까? 본인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기대어 그렇다고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