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새 작달비 내리더니 새벽녘에야 겨우 그쳤다. 이른 아침, 선운사로 오르는 숲길은 안개를 칭칭 감은 채 입 안 가득 비를 머금고 생생하게 살을 찌우고 있었다. 그렇게 좀 서늘했을까. 구름이 걷히더니 키 큰 나무들 사이로 햇살이 미친 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안개는 자취를 감추고 물기를 담뿍 머금은 더위가 슬슬 등을 타고 올라왔다.
절 마당에 들어서자 만등이 햇살을 받아 벅차게 빛나고 있었다. 만세루에선 사람들이 차를 달이는지 자박자박한 발소리와 조곤조곤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선운사 차를 맛보며 쉬어가라고 개방한 만세루다. 마루에 사람이 스미니 더 절집답다. 일상다반사다.
법만스님은 차를 내주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더운 날, 스님은 간편한 차림으로 한적하니 앉아 몸을 달래고 있었다. 사진을 찍어도 되겠습니까 여쭈니, 차려 입을까요 하신다. 원하는 대로 하시라 하니, 그냥 있는 그대로 편하게 합시다 하신다. 그렇게 스님과의 오후가, 더께도 없이 뒷걸음도 없이 헐렁헐렁 굴러갔다.
출가 후 선방에서 수행만 하던 눈 푸른 수좌라고 했다. 선원 대중 스님들 외호하고 시봉하면서 같은 대중으로 살았다고 했다. 종단 이력도 전혀 없다고 했다. 종회의원을 한 적도 조그마한 말사 주지를 한 적도 없고 총무원에서 일한 적도 없고, 그냥 공부만 하다가, 세납도 적은데 본사 주지를 맡았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절집이 사회와 너무 동떨어져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늘 있었어요. 대중과 가까워져야겠다 싶었고, 모든 걸 공개한 투명한 살림이 필요하다 싶었어요. 그것이 우리 절집의 장래를 위해, 모든 대중을 위해 필요하다 싶어 주지 마음을 냈습니다.”
소신이 있었다. 시간이 걸려도 끝을 보고야 마는 성격이 발심했다. 그렇게 주지 소임 산 지 2년이 넘었다. 종단, 교구 안팎에서 긍정적인 반응들이다. 하지만 그게 쉬웠던 것만은 아니다. 처음엔 스님이 가진 가치관이나 계획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절집에서 꼭 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절집 정서에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보니 시선들이 곱지만은 않았다. 오래 가지 못할 거라고 고개를 돌렸다. 그럴수록 스님은 보다 많은 대중과 소통하고 화합하며 살았다. 더디고 힘들더라도 하나하나 갖춰가며 일을 하는 것이 오히려 더 빠른 것이고, 그래야만 연속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주구장창 계획만 말하기보다 결과물을 보여주니 이젠 많은 스님들이 인정도 하고 참여도 한다.
“무지개가 잡힙니까? 고향 뒷산에 무지개가 뜨면 그걸 잡으려고 산을 몇 개를 넘었어요. 순진했는지 멍청했는지….”
사실, 지금도 누군가의 눈엔 스님이 무지개를 잡으려는 것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스님의 손이 무지개에 막 닿기 시작했으니, 누가 봐도 놀랄 일이다.
“살만 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어요. 수행과 복지가 따로 가는 것이 아니에요. 함께 어우러지는 모양새로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21세기엔 문화와 복지가 중심이 되어야 하고, 그럴 때에야 모든 것이 자연스레 따라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포교라는 말씀이다. 그것이 곧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구상에 머문 것이 아니다. 한발 두발 모습을 갖춰가고 있는 중이다. 스님은 지금 진행하고 있는 일들 중에 종단의 선례가 될 수 있는 부분이 상당할 것이란다. 크게는 문화공동체와 승려노후수행관이다.
선운문화공동체는 네 가지 콘셉트를 가지고 있다. 차문화체험관, 사찰음식체험관, 석전스님을 중심으로 한 근대문학기념관, 템플스테이전용시설. 네 가지 중에서도 템플스테이전용시설에 대한 것은 이미 구체화 되었다. 심지어는, 미국 비영리단체 1780군데와 MOU 협약을 맺은 상태다. 선운사에 동시에 8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 생기면, 특히 한국 입양아들과 1.5세대와 2,3세대, 그리고 원주민들까지도 15일 전후로 선운사에 머물며 한국 문화와 사찰 문화를 익히고 체험하는 것에 대한 동의다. 문화관광부의, 템플스테이를 외국인들이 찾아올 수 있게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근처의 석상마을엔 승려노후수행관 건립을 준비 중이다. 이미, 토지를 100% 매입한 상태다. 그곳에 한옥, 황토집 등을 지어 노스님들에게 한 채씩, 많으면 한 채에 두세 분이 머물게 할 생각이다. 거처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고, 생활비도 지급할 것이다. 마당이 있고 텃밭이 있어 소일거리도 하고, 마을에 차문화체험관을 두어 찾아오는 이들이 노스님과 대화도 할 수 있게 해 자연적인 포교의 장도 마련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님들이 젊었을 때 노후자금 마련하지 않고 열심히 수행할 수 있게 하며, 개인 절을 만들지 않아도 되게 하며, 마지막 회향을 잘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자 한다. 그렇게 스님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만 선운사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전국 곳곳에 생길 수 있도록 모범적인 선례가 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여러 연계 사업이 필요하다. 법만스님은, 선운사를 창건한 검단선사의 원력을 1500년을 뛰어넘어 당대에 다시 한번 구현하겠다고 말한다. 검단 선사가 선운사 창건 시, 주변에 산적과 해적들이 많았단다. 그러자 검단선사는 산중 사람들에겐 숯과 종이 만드는 법을 가르쳤고 바닷사람들에겐 소금 만드는 법을 가르쳤단다. 산적과 해적들이 도적질을 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쳤던 것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구휼 사업인 셈이다. 사회복지인 셈이다.
그렇게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봄, 가을이면 검단리 사람들은 보은염報恩鹽이라 하여 소금을 선운사에 시주한다. 1500년 동안 끊이지 않은 일이다. 그러자 정부에서도 역사문화마을을 복원하고 있다. 그래서 마을은 다시금 소금의 혜택을 받게 됐다. 선운사와의 역사가 있는 소금이니 물론 사람들은 더 신뢰한다. 지역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고 절집에도 수익이 되고 포교까지 가능한 형태라 할 수 있다.
“절집은 1500년 고찰이라는 위상을 바탕으로 문화상품이든, 친환경농산물이든 수많은 상품을 개발할 수 있어요. 검단선사 보은염, 선운명차 등 상표등록을 한 것도 많습니다.”
그뿐 아니다. 지금 선운사는 고창종합사회복지관, 노인복지회관 등 네 개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전북에서 제일 큰 복지시설이다. 그러다 보니 복지관으로 인해 또 다른 사업들이 생겨난다. 현재, 전통음식체험관 공사도 시작했고 청소년과 노인을 위한 사업들도 진행 중이다. 고창읍내엔 불교회관과 불교체육시설을 건립 중이다. 현재 스님은 미당문학관 이사장도 맡고 있는데, 선운사와 연계해 문화구역을 만들 생각이기도 하다. 문화도시로까지 역할을 할 수 있게 한다는 구상이다. 스님은, 복지와 문화의 선두가 되면 그만큼 불교의 위상도 올라간다고 생각한다.
스님은 마치 흙에 묻혀 있는 보물을 찾아내는 사람 같다. 스님은 말한다, 전통과 역사에 기초를 두고 그 본심에서부터 출발해 가야 한다고. 그 모습이 꼭, 곁에 두고도 보물인 줄 몰랐던 것들을 손으로 쓱쓱 닦아내고 있는 것만 같다.
“대한민국 조계종은 역사와 전통 때문에 망한다고 말들 하는데, 그렇게 패배적으로만 말 할 게 아닙니다. 짓눌려 있으니 그렇지, 그것을 활용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 법이라는 큰 바다에서 노닐 수 있어요. 역사와 전통으로 살맛나는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어요.”
스님은 현재 선운사 역대 큰 스님들을 재조명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당대가 어려울수록 과거에 치열하게 살았던, 어렵고 힘든 시절에도 수행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았던 스님들의 정신을 본받자는 취지다.
스님은, 한국 불교가 살아나면 대한민국도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불교는 자산이 충분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대신, 이젠 절집도 경영의 차원이 되어야 하며, 그것이 열린 경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걸 공개하는 투명한 살림만이 지금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스님이 지금 해나가는 일들을 그런 범주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존심을 가지고, 제대로 된 승가를 만들고 싶은 것이 나의 원력입니다. 내 초심이 끝까지 견지되기를 나도 바랍니다. 스님이라면, 돈과 명예와 권력에 자유로울 수 있는 자존심이 있어야 해요. 나는 내가 몸담고 있는 이곳이 손가락질 받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길을 잘 터가는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진행 중인 일들을 숨 가쁘게 말하던 스님이 문득 관음전을 가리킨다.
“저기가 예전엔 관음전이 아니었어요. 노스님이 머무는 세 칸짜리 방이었지. 내가 처음 선운사에 하룻밤 묵은 곳이지요.”
스님과 선운사와의 연은 깊다. 어려부터 생사 문제에 고민이 많았던 스님은 이리저리 잘 떠돌았다. 그러나 그 고민은 어디에 가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대학교 3학년 때 등록금을 들고 여행을 시작했다가 우연히 오게 된 선운사. 태어나서 대웅전도 한번 들어가 본 적 없던 스님은, 돈이 다 떨어져서 배가 고파 처음으로 절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잠도 얻어 잤다. 세 칸짜리 방, 두 칸은 풍으로 쓰러져 전신을 쓸 수 없는 노스님이 쓰시고 나머지 한 칸엔 수발드는 행자가 머물렀다. 그 행자와 함께 누워 자는데 노스님의 가래 기침 소리, 밤새 괴로워 행자를 찾는 소리, 산중의 소쩍새 울음소리가 마음을 뒤척이게 했다. 품어온 의심들이 이 공간에서 해소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다음날 아침이 되자마자 출가하겠다고 했다.
“은사 스님이 머리를 깎아주시며, 아따 이놈 골상 좋다! 하고 머리통을 한 대 때리시대요.”
그렇게 해서 스님의 삶이 시작됐다. 선방에도 다니고 동국대도 다니고, 그러다가 선운사 창당암에선 선방을 개원하기도 하며 12년간 살았다. 선운사 산중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러다가 2007년엔 주지로 앉았으니 그 인연, 깊고도 깊다.
“선방에 앉아 세상이랑 나는 전혀 상관없다고 하면, 대체 왜 수행을 하나요? 자기 수행은 수행이고, 그 수행력을 바탕으로 사회에 제대로 목소리를 내줘야 해요. 그게 바로 중생 구제고, 그것이 바로 자기 구제이기도 합니다.”
선방에 앉아 수행만 하던, 지금 펄펄 날아다니는 스님의 말씀이다. 선방 안의 스님들도 고개 끄덕일 이야기라며 스님이 컬컬 웃는다. 이 더운 날, 속까지 시원해지는 참 시원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