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련회를 위해 해인사로 가는 날, 바야흐로 장마철의 시작이었으니 비가 많이도 내렸다. 무거운 짐 가방과 쏟아지는 비 때문에 제 구실도 못하는 우산을 들고 산길을 한참 걸어 올라가며 수련회고 뭐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철부지 대학생 딸이 불안한 부모님께 전화가 걸려오는 것이었으니,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해인사 수련회에 참가한 경험이 있는 엄마의, 나의 수련 생활에 대한 걱정이 이해가 안 되는 터였다. 하지만 화장품, 핸드폰 등 나의 모든 용품들을 몰수(?)당하는 그 순간부터 엄마의 걱정이 현실이 되는 느낌을 받았으니 화장도 못하고 핸드폰도 못 쓰고 입었던 옷은 손수 빨아서 입는 거라던 엄마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 후 4일 동안 나는 민낯으로 핸드폰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쁜 수련회 일정을 소화해내고 나면 밤에는 하루 동안 입었던 옷을 빨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으니 내 인생 첫 손빨래의 시간들이었다. 첫날 저녁부터 발우공양이라는 걸 하며 놀랐는데 심지어 퇴수물 까지 나눠 마시는 역사적인 경험을 했고 나에겐 초저녁과도 같은 밤 아홉시에 잠자리에 들면 잠 못 이루며 뒤척였고 새벽 세시에 어김없이 불이 켜지면 반 수면 상태로 사물 치는 걸 보러 갔다가 예불에 참석한 후 ‘수마와의 전쟁’, ‘무서운 죽비 소리’ 로 요약할 수 있는 참선까지 해야 했다. 절은 어찌나 많이 시키시는지 108배, 3보1배, 1080배 등 4박 5일 동안 절 한 횟수가 살면서 평생 해 본 횟수보다 많았으니 처음엔 내가 왜 사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편안한 집 생각과 안락했던 지난 날 의 추억(?) 만이 간절했다.
하지만 해인사에서의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잠자리에 든 후 밝아 오는 새벽 여명 속에서 듣는 법고 소리에 마음이 설레는 것을 느꼈고, 예불에 참석해서 ‘지심귀명례’라는 아름다운 말로 하루를 시작하고, 참선을 통해 자꾸 밖으로 향하려는 마음을 안으로 향하게 하며, 절을 하며 나를 낮추는 법을 배우고 진정한 깨달음은 극기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느끼는 시간이 행복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행복감이 한 순간의 감정, 몸의 편안함, 물질적인 것을 통해 느꼈던, 그리고 결국은 고통에 지나지 않았던 상대행복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마음에서 오는 절대행복에 가깝다는 것을 느꼈다. 몸은 수련회에 오기 전보다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마음은 평온하고 고요해져 갔다.
수련회에 참가하면서 ‘초짜’ 보살로서 처음, 그리고 가장 많이 접한 말은 下心 이었다. 나를 낮추고, 나를 내세우지 말고, 일체의 판단을 하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이 납득이 안 가고 어려웠다. 겸손이 미덕이긴 하지만 명백히 상대가 틀렸고 내가 옳다고 생각 될 때는 어찌해야 하는지, 사람 사이의 생각과 수준이 달라 늘 갈등이 끊이지 않는 세상에서 현실적으로 하심을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았다. 하심, 하심, 또 하심. 그렇게 절을 하면서도 참선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되 뇌이며 내 마음속에 쌓여있는 탐냄, 성냄, 어리석음이 모두 내가 옳고 잘났다고 생각하는 교만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일체의 판단을 삼가라는 말씀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수련회를 다녀온 후 나를 낮추는 하심을 1차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으로 매일 아침 108배를 하고 있는데, 아직은 나에게 너무나 어려운 숙제다. 평생을 두고 조금씩 조금씩 실천해 나가야 하는 숙제라고 생각한다.
절에 있으면서 스님들과 함께 기도하고, 절하고, 참선하며 내 어리석음은 다 부처님께 내어 드리고 청정한 마음을 챙기는 시간이 행복하면서도 다시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마음의 고요와 평화가 깨질까 두려웠다. 회향 전 마지막 날 밤에 만남의 시간을 통해 습의사 스님들은 바깥에서도 이곳에 있는 동안 맑아진 식이 흐려지지 않도록 하라,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역할을 열심히 하라, 바깥에서도 절에서처럼 늘 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산다면 좋겠지만 값지고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일어났을 때와 잠자기 전에 어떤 형태라도 상관없으니 30분간 기도를 하라는 말씀 등을 해주셨다. 스님들께서는 일상으로 돌아간 우리의 마음이 흐려지고, 바깥 세상에 휘둘릴 것을 이미 알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회향식이 끝난 후, 절을 나서는 순간 흐트러질 마음이 두려우니 몇 일 더 있어보자고 생각하고 해인사에서 하루 밤을 더 보냈지만 내가 나 자신의 마음을 다잡지 않자 절에 있어도 마음이 시끄러워짐을 느꼈다. 다음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삼보일배를 드렸던 법보전 주련의 말씀이 떠올랐다.
원각도량하처圓覺道場何處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是
깨달음을 위한 수행의 도장이 어느 곳인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자리
이제 나는 모든 것은 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며, 내가 내 마음만 챙긴다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지금 이 자리임을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 몸의 편안함을 좇고 요행을 바라는 나 자신의 마음을 경계하며, 일어나서 그리고 잠자기 전에 108배를 올리고 기도를 하며 매일 마음을 챙기는 공부를 해나가려한다. 힘들어도 꿈과 웃음을 잃지 않으며, 평생을 두고 조금씩 조금씩 노력해 나갈 때, 우리가 어릴 때 꿈꾸었던 이상의 세상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는, 지금 이 순간이 우리가 꿈꾸던 세상이라는 스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오늘 하루도 희망과 확신의 마음을 챙기는 수행자의 삶을 살고 싶다.
해인사를 감싸주던 가야산의 안개, 암자순례 시간에 스님들과 함께 걷던 숲길의 녹음, 사물 칠 때 새벽의 청정한 공기, 참선을 할 때 들려오던 새소리, 땀을 흘리며 절을 하고 있을 때 불어 와 주던 바람, 산행을 할 때 발을 담궜던 시원한 계곡물과 스님께서 썰어주신 이제껏 먹어본 중 가장 맛있었던 수박. 해인사는 벌써 나에게 그리움이 되어간다. 지금은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다. 이번 수련회를 통해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이 부처님의 불성과 닮아 있다는 말씀을 듣고 나의 직업에 대한 마음가짐을 다시 한 번 가다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후 내년 여름에는 부처님의 불성을 간직하고 있는 예쁜 아이들의 손을 잡고 다시 해인사를 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