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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현상으로서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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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이평래 2009년 08월 330호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다. 신을 믿는 것도 있고 믿지 않는 것도 있다. 종교를 사회현상의 하나로 보면 그것은 그렇게 따질 것도 아니다. 형이상학적인 실체의 존재여부는, 그것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가정假定이며 가설假說(upacāra)일 뿐이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치답置答(sthāpanīya-vyākaraṇa) 또는 무기無記(avyākṛta)라고 하여 논외로 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종교와 사회와의 관계를 논의해보려는 것이다. 종교와 사회는 서로 상호관계성을 갖는 독립현상이지만, 그러면서도 양자는 도덕⋅윤리의 영역에서 서로 만난다. 종교에 있어서 영원한 이상理想은 현세적 명리名利가 아니라, 인간이 새로 태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불교가 외치는 중생제도는 현대적 의미로는 사회적 구제이다. 사회적 구제란, 새로운 조직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극락세계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아닌 다른 어떤 곳에 따로 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님을 유념해야 한다. 바로 이 세계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사회적 영향력을 논의할 수 있는 근거이며, 사회문제의 표층으로부터 심층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계급적 차별이 어떤 역할도 하지 않고 의미도 없는 평등과 자유의 공동체를 건설한 그 자리가 바로 불국정토이다. 원효 보디쌋뜨와는, 붓다님의 마음자리(buddhadhātu, 佛性)의 공유를 전제로, 너와 내가 하나인 평등을,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수행을 하여 니르와나(nirvāṇa, 涅槃)를 성취함으로서 영원한 자유의 향유를 가르친다. 그것은 현대인의 삶에도 강력한 희망과 역동성을 던져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종교를 사회현상으로 본다면 불교도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럴 경우 종교의 사회적 기능이 요청되듯 불교도 사회적 기능을 짊어져야 한다. 문제는 언제 어디서나 불교의 본질(독특성)을 잘 지키면서 그 사회에의 적응(융합성)이 얼마나 재빠르고 신선감이 있느냐 하는 점이다. 독특성과 융합성, 이 두 가지는 바로 불교의 발전과 쇠퇴로 귀결된다. 인디아에서 브라흐마나종교는 불교의 흡수논리에 끌려드는 듯하지만, 반대로 불교는 브라흐마나종교를 개혁하여 다시 태어난 힌두교의 흡수논리에 영합하여 쇠퇴해버린 뼈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불교도 사회현상의 하나인 이상 정치⋅경제⋅문화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의 모든 현상을 논의하고 선도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잠시 유럽문화를 들여다보자. 그리스철학의 바탕위에 기독교정신과 함께 성장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여 끊임없이 교류하고 경쟁하면서 세계를 넓혀간다.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지동설만을 보더라도 유럽 사람들은 세계를 총체적으로 보고, 그 속에 세계를 하나의 무대로 만들려는 안목이 열려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동양보다 훨씬 빨리 농경사회로부터 상공업사회로 전환한다. 공장제수공업(Manufacture)의 출현이 그것을 말해준다. 결과적으로 시장은 자꾸 커지고 수요는 더욱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된다. 공장제수공업조차도 당시의 동양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한 것이지만, 그것도 수요를 따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증기기관과 기계장치가 공업생산의 혁명을 일으킨다. 공장제수공업을 대신하는 근대적 대공업이 나타나고, 그것을 기반으로 사유재산을 소유하는 백만장자들이 출현한다.
이로 인하여 유럽 국가들은 봉건시대를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으며, 봉건계급을 무너뜨리고, 신자유주의와 산업기술혁명을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사회를 구축한다. 이와 같은 자본주의의 형성에 관한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와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의 이론은 차치하고라도, 벌써 16세기부터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는 사실 그 자체를 불교로서도 사회학적 관점에서 천착할 필요⋅충분조건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의 성장은 자본주의계급(Bourgeoisie)을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의사와 법률가, 성직자와 시인, 학자와 기술자를 자신들이 고용한 임금노동자(Proletariat)로 전락시킴으로서 노동의 착취와 빈부의 격차에 관한 문제가 사회의 표면으로 떠오른 것이다. 빛에 그림자가 따르는 것처럼 자본주의의 순기능에 따르는 역기능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계급간의 대립으로 규정하고, 세상을 부르주아(Bourgeois)와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의 대립구도로 보는, 그러므로 부르주아(Bourgeois)의 사유재산을 폐기하고, 분배의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사상가와 그를 추종하는 집단이 형성된다. 그리고 우리의 처지에서 보면 첫닭도 울기 전인 1848년 공산당선언을 한다.
이와 같이 유럽사회를 자본주의사회로 전환하는 데에 기독교 특히 프로테스탄티즘이 어떻게 작용하였는가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자본주의가 일찍 형성되고, 또한 그에 대한 역기능이 사회의 수면위로 떠올랐기 때문에, 그것을 해결하려는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공산당선언이다. 그만큼 유럽사회는 발 빠르게 변화하고 또 발전하고 있었는데, 동양사회는 합리적 사고의 결여로 인하여 새 세상을 열지 못하였다.
불교를 사회현상으로 볼 때, 무엇을 해야 하고 또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만일 불교가 현실에서의 사회⋅경제적 모순으로 말미암아 인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속의 허망성만을 내세워 현실도피 쪽으로 끌고 간다면, 불교에서의 중생구제라는 本願精神은 한낱 허구일 뿐이다. 한국에서의 불교가 그 실상을 잘 알려주고 있다.
사회현상으로서의 불교라는 인식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그렇게 되면 세상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바로 알 수 있다. 불교의 진리는 무엇인가. 緣起說이다. 연기설을 따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佛敎徒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연기설은 一者만 존재하는 명제라면 성립할 수 없다. 연기설이 성립하려면 둘 이상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나 이슬람교는 우주⋅인생의 문제를 불교와 같이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다.
맨땅 위에 두 개의 갈대다발이 서로 기대고 서있다. 하나를 넘어뜨리면 다른 하나는 어떻게 될까. 넘어져버린다. 이것이 바로 연기의 법칙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어느 것도 저 홀로는 존재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는 서로 기대어야 존재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연기의 법칙을 통해서 相依性⋅相互性의 정신을 유추할 수 있다. 이 본의를 잘 살려 모두 함께 행복과 평화를 누리자는 것이 거룩하신 붓다님의 가르침이다.
사회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를 다시 반조해 보자. 거미줄처럼 수평⋅수직으로 서로 얽혀서 관계를 맺고 있다. 인드라의 그물(Indra-jāla, 因陀羅網)은 그와 같은 법칙을 아주 잘 말해주고 있다. 사회의 모든 현상은 독자성을 띄면서도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 그런데 불교는 그런 세상을 俗世라고 폄하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화엄경》에서는 생사윤회와 중생교화 그리고 심지어는 일체악마까지도 수행의 터《大正藏10-286c》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日本의 하꾸인(白隱)선사는 “동중의 공부가 정중의 공부보다 백천억배 훌륭하다(동중공부승정중공부백천억배動中工夫勝靜中工夫百千億倍)”라고 설파하였다. 이런 말씀 속에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만, 중생의 삶의 현장을 수행의 터로 삼으라는 가르침이다. 언제 어디서나 계율의 그물에 걸리지 않음을 전제로 한다. 이 세상에서의 차별은 까르마(Karma, 業)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