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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고 또 부끄럽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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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 - 이상문 1990년 11월 105호
걷잡을 수 없이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의 집 뿐만이 아니었다. 온 마을 온 들판에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강둑이 무너져서 군 전체가 물에 잠겨가고 있다고 아우성을 쳐대는 마을방송의 스피커가 아니더라도, 벌써 사태는 심각해진 것이 분명했다.
장명부는 가게에 있던 손금고를 가져다가 이불장 속에 넣어 두었던 현금과 아내의 금목걸이와 팔찌 같은 것들을 챙겼다. 만일의 경우에 그것들이라도 갖고 나가기 위해서였다.
집 앞 도로에 차오른 빗물이 가게 문턱을 넘어서 안으로 들어오더니,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순식간에 냉장고의 아랫도리를 휘감아 버렸다.
그는 제발 제발 비가 그치고, 제발 제발 물이 더는 차오르지 말아주었으면 하고 눈을 감고 벌어 보았다. 하지만 물은 아랑곳없이 차 오르고 있었다.
물은 금새 냉장고의 허리께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그는 이제 망했구나 하고,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면서 어금니를 깨물었다. 팔다가 남은 쇠고기 2십여 근과 돼지고기 3십여 근이 지금 냉장고 속에서 물에 잠겨가고 있을 것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그의 머리 속에집 뒤쪽의 우리 속에 네 발을 묶은 채 가둬둔 돼지가 떠오른 것이었다. 어제밤에 밀도살을 할 생각이었는데, 비가 하도 내려서 그대로 둔 돼지였다. 쇠고기야 하는 수 없이 읍내 도살장에서 받아다가 팔지만, 돼지고기마저 받아다 팔게 되면 남는 것이 적어서, 간혹 직접 밀도살을 해서 섞어 팔아야 했던 것이다.
그는 그 돼지를 어떻게 할 것인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로 두면 다리 한번 허우적거려 보지 못한 채 꼼짝없이 떠내려 가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또 얼마나 손해가 더할 것인가?
장명부는 어떻게든지 손금고와 그 돼지만은 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야 물이 빠지면 장사를 시작할 것이 아닌가.
손금고를 장농 위에 올려놓은 채 식칼을 찾아들고 물길을 헤엄쳐 집 뒤로 돌아간 그는 반쯤 물속에 잠긴 우리 속에서 두 눈을 껍벅거리며 누워 있는 돼지한테 다가갔다.
돼지는 잔뜩 겁에 질렸는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있다가 그가 다가가서 네 다리를 묶은 새끼를 잘라주자 비로소 몸을 떨면서 꿀꿀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긴 새끼로 돼지 왼쪽 앞다리를 묶어서 우리의 기둥에 묶어 놓았다. 그 새에 물은 그의 허벅지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안방으로 돌아온 그는, 지난 달 말일날 24개월 할부로 들여놓은 24인치 짜리 음성다중 칼라 텔레비전이 물에 잠겨가는 것을 보고서 질겁을 했다. 그는 텔레비전을 들고 서 장농문을 열고 그 윗칸에 올려놓았다. 하마터면 5십만원이 넘는 돈을 그대로 날릴 뻔했던 것이었다.
ꡒ여러분, 마을주민 여러분, 이것이 마지막 방송입니다. 주민 여러분께서는 이런 때일수록 침착하게 행동해 주십시오. 이미 정부 당국에서는 군과 경찰의 장비와 인력을 총동원해서 구조작전에 들어갔다고 하니까 침착하게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ꡓ
마을 방송장비가 있는 반장네도 이제는 방송이고 뭐고 대피준비를 하느라고 경황이 없어진 모양이었다. 진작 전기가 끊어졌고 전화도 불통인데 바테리를 써서 저만큼이라도 애를 써준 반장이 고마울 뿐이었다.
이제는 앞을 가리고 사방으로 쏟아져 내리는 괴괴한 빗소리 뿐이었다. 그리고 뱀처럼 살금살금 그의 몸뚱이를 휘감아 올라오는 물이 있었다.
물은 벌써 그의 허리께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문득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했다.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장인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서 이틀 전에 영주로 떠난 것이었다.
ꡒ아내와 자식들도 못보고 죽는다면….ꡓ
물이 허리께를 넘어서자, 그는 아내와 아이들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물과 함께 공포감이 차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ꡒ아니야. 그나마 다행이지. 그것들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면…. 돌아가신 장인 영감님이 식구들을 구해주시는구만….ꡓ
장명부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장농 위에 올려놓았던 손금고를 내려서 손에 쪽 쥐었다. 더는 방안에 있을 수가 없어서였다. 손금고를 들고 마루로 나간 그는 마당가에 서 있는 오동나무를 향해 헤엄을 쳐서 그의 키가 넘게 물이 찬 마당을 가로질렀다.
오동나무는 그가 붙들고 올라가자 생각보다 약해서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그는 거기서 다시 손금고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를 써가면서 처마를 붙들고 지붕 위로 올라갔다.
비는 무수한 송곳처럼 장명부의 몸뚱이를 향해 내려 꽂혔다. 그는 세상에 홀로 버려진 듯한 느낌이었다. 외로웠다. 그리고 더할 수 없이 두려웠다.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사람들이라도 볼 수 있다면 얼마간 위안이 될 것 같았다. 그의 집이 마을에서 떨어진 한길가에 있기도 했지만, 억수로 쏟아지는 비 때문에 지척이 분간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극심한 추위에 시달렸다. 그리고 잠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 때 꿀꿀 거리는 돼지울음이 들려왔다. 그는 그곳을 짐작해서 엉금엉금 기어갔다. 아! 이렇게 반가울 수가 있나! 새끼줄을 길게 해서 묶어 놓았던 돼지가 바로 처마 밑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장명부는 돼
지를 끌어올려서 꼬옥 껴안았다. 돼지의 따뜻한 체온이 그에게 전해져 왔다.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게 반갑고 고마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돼지를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물이 거의 처마 밑까지 차오를 무렵에야 비가 그쳤다. 그러나 물은 계속해서 차오르다가 지붕을 거의 다 덮은 다음에야 멈췄다. 그는 그때서야 비로소 잠에서 깨어났다.
지붕 위로 올라와 있는 마을 사람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돼지를 껴안고 앉아 있던 장명부는 사람들을 향해 이제 살았다는 듯이 소리를 지르고 손을 흔들어대기 위해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순간 온 몸이 굳어지는 듯한 공포감에 사로잡혀 무너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홍수로 집을 잃은 뱀 한 마리가 지붕 위에 같이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얼른 보아도 흑갈색의 삼각진 머리와 짤막한 몸똥이가 분명한 독사였다. 뱀은 자신을 향해 슬슬 기어 오고 있었다. 그는 금방까지 안고 있던 돼지를 뱀을 향해 밀어내는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했다. 독사는 한 번 독을 뿜고나면 금방 다시 뿜을 수 없다고 하던 말이 생각난 것이었다. 독사가 일단 돼지를 물고 나면, 독이 빠져버릴 테니까 그때 가서 처치할 셈이었다.
그가 밀쳐내자 돼지는 바보스럽게 독사한테 엉급엉금 다가갔다. 위험을 느낀 독사가 머리를 불끈 치켜드는 성싶었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독사 곁으로 다가간 돼지는 쉽게 앞발 하나로 독사의 목을 밟는가 했더니, 그대로 몸통부터 뱀을 씹어 삼켜버리는 것이
었다.
뱀을 다 삼켜버린 돼지가 웃는 듯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장명부는 그 순간 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부끄럽고 또 부끄러워서 물 속에라도 뛰어들고 싶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