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보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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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여로 - 정찬주
1990년 11월 105호
선재아버지가 일년에 한두 번 상경하는 것은 사실 선재가 장남이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서울 생활을 장남으로서 성공적으로 잘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를 점검해 보기 위해서 서울을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선재는 군대생활시절 내무검열을 받던 때의 기분이 들었다. 집안의 식구들이 청소는 잘 되어 있는가, 아이들의 인사성은 밝은가, 집안 빈 땅에 채소 같은 것이 심어져 있는가 등등….
아버지의 지적 사항을 미리 점검해 보고 시정 조치를 취하곤 했었다. 이러한 긴장으로 어떤 날은 아내와 다투기도 하였다.
ꡒ작은놈이 찢은 모양인데 보기가 좋지 않으니 종이를 사다 도배 좀 해요. 벌써 며칠째요.ꡓ
ꡒ며칠째라니요?ꡓ
ꡒ아버지가 올라오신다 하지 않았소. 보시면 틀림없이 한 소리 하실텐데ꡓ
ꡒ정 보기 싫으면 당신이 하시지 그래요. 아버지 핑계대지 말고….ꡓ
ꡒ핑계라니?ꡓ
선재는 긴장하고 있던 터라 자제력을 잃고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러자 선재아내도 지지 않을 기세로 대들었다.
ꡒ왜 화를 내고 그래요?ꡓ
ꡒ아버지 성미 잘 알면서도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말하니까 그렇지.ꡓ
싸움을 하다 보면 알맹이는 언제나 엉뚱한 데로 달아나 버리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 알맹이가 완전히 실종되어 버리고 나면 싸움도 맥없이 수그러 들어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문제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긴장 때문이었다.
그날도 선재는 아내와 가벼운 언쟁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상경 도착시간을 놓고서였다.
ꡒ몇시에 도착이지요?ꡓ
ꡒ영등포역에 저녁 8시 30분이래요.ꡓ
그렇다면 버스를 타고 오셨어도 진작 집에 도착할 시간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려고 모두들 침만 꿀꺽꿀꺽 삼키고 있으려니 기다리는 시간이 더욱 지루했다.
ꡒ그러니까 당신이 마중 나갔어야 옳아요.ꡓ
ꡒ그건 당신도 잘 알잖아요. 아직 정정한데 쓸데없이 마중이나 나다닌다고 아버님이 화내실 것을….ꡓ
ꡒ그야 작년 얘기 아니요. 노인은 하루가 다르다고ꡓ
ꡒ아버님이 정말 2시 차를 타시긴 한 거예요?ꡓ
ꡒ전화로 다 확인해 봤어요. 오전에 회사 전화로.ꡓ
국물이 식어갈 무렵에는 큰아이와 작은아이가 투덜거렸다.
ꡒ아빠, 우리 먼저 먹으면 안돼요?ꡓ
ꡒ언제 오실지 모르잖아요.ꡓ
우거지상을 하고 있는 선재의 얼굴을 참작해서 눈치만 보고 있던 녀석들이 더 이상 못 참겠다고 하소연을 해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녀석들이 숟가락을 막 들고 있는 사이에 선재아버지가 들어선다면 그거야말로 낭패였다.
ꡒ조금만 참아라. 금방 오실거야.ꡓ
ꡒ10분만 더 참겠어요.ꡓ
그러나 큰아이와 약속한 10분이 지나도 선재아버지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이제는 옷을 걸쳐 입고 영등포역으로 나가 노인의 행방을 수소문해 보아야 할 판이었다.
그 동안 아내가 시골로 전화를 하고, 영등포역으로 문의를 해보고 하였지만 아버지는 분명 제시간에 도착한 것이 틀림없었다.
ꡒ신고라도 할까요?ꡓ
ꡒ더 기다려 보자고. 노인이라고 하지만 정확한 분이시니까.ꡓ
ꡒ하긴, 버스를 반대 방향으로 타셨을지도 모르죠ꡓ
ꡒ한두 번 오신 것도 아닌데 그럴리야 있겠소ꡓ
노인이라고 하지만 벌써부터 버스번호를 잘못 볼 만큼 눈이 흐려졌다고 믿기는 싫었다.
ꡒ가로등도 환하고, 걸어오셔도 20분 거리인데.ꡓ
ꡒ혹시 걸어오시는게 아닐까요?ꡓ
ꡒ그럴리야 있겠소.ꡓ
방정맞게 불길한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여자도 아닌 남자를, 그것도 노인을 인신매매할 리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신문 사회면에서 보았던 톱기사가 생각나 가슴이 덜걱했다. 생사람을 끌어다가 노동을 시킨다는 복지원이 떠오르면서 잠시 눈앞이 캄캄했다.
ꡒ그래, 이 바닥이 극락은 아니지.ꡓ
ꡒ갑자기 극락이라니 무슨 말이예요?ꡓ
아내의 눈이 금새 커졌다. 웃옷을 걸치면서 외출을 서두르고 있는 선재가 엉뚱하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선재를 찾는 선재아버지의 전화였다. 뛰어가 전화를 받은 큰아이가 이산가족을 찾은 듯 환호성을 질렸다.
ꡒ할아버지예요?ꡓ
ꡒ나 좀 바꾸어라.ꡓ
선재는 거실로 뛰어가 큰아이한테서 송수화기를 나꿔채었다.
ꡒ거기, 어디세요?ꡓ
ꡒ어디긴 이놈아, 니 집 앞 공터 의자에 앉아 있다.ꡓ
ꡒ밤공기가 좋아서 걸어왔다.
니놈들에게 줄 게 있으니 모두 어서 이곳으로 나와라.ꡓ
ꡒ네네. 아버님.ꡓ
식두들 모두가 눈을 둥그렇게 뜬 채 밖으로 나섰다. 잠시라도 지체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법석을 떨었다.
그런데 선재아버지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빈 벤치에 덩그란히 혼자 앉아계실 뿐이었다. 이윽고 선재아버지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ꡒ저 가을 보름달을 가져오느라 늦었다. 서두르지 말고 달처럼 원만하고 넉넉하게 살거라.ꡓ
ꡒ가을 보름달처럼요?ꡓ
잠시후에야 선재와 그 아내는 바보처럼 둥근 달을 바라보며서 히죽히죽 키득키득 웃음으로 맞대꾸하였다. 아버지의 말씀은 그 어떤 법문보다도 가슴에 와닿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