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영국 로슬린 연구소의 월머트 박사에 의해 복제양 돌리의 탄생이 발표된 이후 생명복제라는 말은 이제 더 이상 낯선 연구실의 단어가 아니라 어디서나 쉽게 들을 수 있는 친숙한 단어가 되었다. 21세기들어 이러한 생명공학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은 각 나라마다 이 분야에서 기술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투자한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으로 말미암아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결과들이 발표되고 있다.
오늘날의 생명복제 기술은 인류공영의 공리적인 목적을 앞세우며 매우 빠르게 성장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1)
하지만 생명복제는 단순한 과학적 분야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것은 인류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윤리, 법 등에 깊게 연결될 수 밖에 없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며 전 세계인의 문제이다. 뿐만 아니라 생명 복제는 종교적으로도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이와 같은 생명공학의 성과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불교가 인류의 모든 문제에 답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적어도 인류의 어떤 문제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고 의사를 표명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인간복제나 유전자 조작은 과학기술의 영역을 넘어서 인간의 가치 문제를 야기한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불교적 관점과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과도한 관심의 표명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복제를 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학을 도구로 삼아 노력해온 것들은 일차적으로는 보다 안락한 삶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이면으로 눈을 돌려보면 거기에는 수명 연장에 대한 갈망이 있고, 영원한 삶에 대한 갈망이 있다. 과학기술은 영생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단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즉, 인간복제를 바라는 본질적인 이유는 질병과 죽음을 극복하는 영생을 바라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복제한다면 유전자적으로 자신과 동일한 인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여 이를 영생으로 여길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인간복제가 가능해지면 우리는 자신을 복제함으로써 영구히 삶을 연장시킬 수 있을까? 일란성 쌍둥이들은 유전자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인격을 가진다. 이 경우에서 보듯이 복제는 동일한 인격을 보장하지 않으며 동일한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생명관은 삼세(전생, 현생, 내생)와 오도(지옥, 아귀, 축생, 인간, 천상)가 서로 넘나들 수 있다는 윤회론적 세계에 토대하고 있다. 따라서 한때 축생이었던 존재가 인간이 될 수 있으며, 또 인간이었던 존재가 축생이 될 수도 있는 상호 열려진 생명체계를 갖고 있다.2) 그러한 의미에서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는 소중하다. 어떠한 생명도 다른 생명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생명복제 기술은 남을 해쳐 자기를 이롭게 하는 기술이므로 허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불교의 연기설에 의하면 현 인류의 정신적, 물질적 모든 소산은 그 동안 인류가 행하여 온 결과로써 나타난 것이며, 인간복제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연기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인간복제의 문제는 윤리적, 도덕적 선악 문제를 떠나 그 동안 인간이 행하여 온 행위의 결과로써 나타난 것일 뿐이다.
불교의 업설에 의하면 인간복제의 문제점은 인위적 조작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업은 그 자체의 논리로 성숙하면서 윤회를 계속 진행하거나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인간복제는 그 업의 성숙을 방해함으로써 업 자체의 능력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불교의 궁극목표는 고통에서의 해탈, 즉 윤회의 업보로부터 벗어나는 것인데, 인간복제는 인위적 조작으로 업 자체의 능력을 감소시켜 벗어나야 할 윤회를 더욱 연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인간복제는 결과적으로 인간의 영생을 추구하는 생존욕의 충족이며, 생존욕에 사로잡힌 인간의 이기심을 충족시키려는 것이다.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는데 인간복제는 또 다른 윤회의 굴레를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불교가 지향하는 것은 결코 생명을 연장하거나 다시 태어나는 데 있지 않다. 불교가 지향하는 것은 윤회로부터 벗어나 해탈을 성취하는 데 있다. 욕망이나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진정한 행복의 성취(해탈)는 과학기술에 의해서 만들어지거나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수행과 노력의 결과로써 주어질 뿐이다.
우리는 21세기를 맞이하여 새로운 시험대에 서 있다. 실체적 존재론에 입각하여 대립과 투쟁으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비실체론적인 존재론에 토대하여 협력과 공생의 길로 나아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나의 입장은 단연 후자 쪽이다. 이 우주의 어떤 것도 다른 것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교의 무자성의 진리만이 생명복제의 문제에 대해 최선의 해결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애초에 서로유기적으로 평등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의존하고 상호작용함으로써 자신의 본래적 생명력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론적 생명관을 우리의 세계관으로 받아들일 때, 이 세계의 낱낱의 모든 존재가 더없이 소중하고 위대한 것임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1) 의학적 측면에서 인체장기 또는 조직을 생산해내어 이식에 이용하면, 장기에 거부반응이 감소되고, 난치병 극복이 가능해진다. 현상적 측면에
서 자기의 자식을 가지기를 원하는 불임부부들에게 불임치료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또 부모로부터 유전적 결함을 물려받을 가능성을 사전에 예
방하므로 수술에 따르는 어려운 결정이나, 가족 사이의 갈등 등의 문제를 피할 수 있다. 사회적 측면으로 복제로 인간을 만들 수 있다면 사회적
으로 귀감이 가는 인물이나 천재성을 가진 개인을 복제해 사회이익에 이바지할 수도 있다
2) 불교의 실유불성론悉有佛性論의 관점에 따르면, 식물과 미생물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원리적으로 평등한 존재로서 상호이동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삼천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는 원리적으로는 서로 의존적 존재(연기적 존재)로서 동등한 내재적 가치를 갖고 있다.
정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