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등 속의 법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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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장나영
2009년 05월 327호
햇살 속에 아기 손바닥 같은 여린 잎들이 미풍에 한들거린다. 초록의 숲길을 따라 일렬로 수놓인 오색의 연등들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길을 인도한다.
사월 초파일에 등을 밝히는 것은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날을 봉축하고 불은에 감사드리며 번뇌와 무지로 가득 찬 어두운(無明) 세계를 부처님의 지혜로 밝게 비추어 온 세상이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로 충만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어른들과 함께 가던 새순 같은 아이들이 꽃등을 보고 축제 분위기를 느끼고 발걸음이 경쾌하다. 동그랗게 부풀려진 풍선 같은 연등을 맑은 눈망울에 가득 담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깡충거리며 뛰어가다가 이내 뒤를 돌아본다.
아이들의 모습이 등에 담겨 삼십여 년 전 나의 어린 시절 추억들이 연향으로 피어오른다.
사월 초파일 동화사에는 형형색색의 등이 가득 펼쳐져 있었고 경축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얇은 종이 꽃잎을 풍성하게 붙여 만든 연꽃등, 卍자를 그려 넣은 팔각등, 색색의 주름 연등들이 법당 안팎으로 장엄되어 있었고, 등 끝마다 축원을 담은 하얀 이름표들은 따스한 바람이 스칠 때 빛을 받아 눈이 부시게 나풀거렸다.
어머니는 부처님께 기도드리고 나서 수많은 연등들 속에 우리 가족 이름이 쓰여진 등을 찾아보시고 밝고 편안한 표정이 되셨다.
사람들이 등불을 밝혀 공양을 올리는 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예경하고 온 세상에 진리의 법등을 밝히겠다는 불자로서의 서원과 부처님의 자비 광명으로 가까운 이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진실하고 소박한 마음도 담겨 있다. 나의 어머니도 신심과 정성으로 부처님 전에 가족들을 위해 축원하는 등을 다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절에 가실 때 며칠 전부터 부처님 전에 올릴 공양물을 정성껏 준비하셔서 회색 걸망에 소중히 담아 등에 지고 내 손을 이끄셨다. 어머니께서 법당에서 기도할 적에 나는 댓돌 옆 따스한 햇살이 내려앉은 곳에 쪼그리고 있었다.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바르르거리는 작은 소리에 시선을 옮겼다. 일벌 한 마리가 기운을 다했는지 땅바닥에서 몸을 떨며 버둥거리고 있었는데 이따금 온 힘을 다해 숨 가쁜 날갯짓을 하여도 제자리에서 맴돌 뿐 날지 못했다. 삶과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나이에 벌의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는데 지나가시던 스님께서 누구 딸이지 하시며 다정하게 다가오신 기억이 어렴풋이 남는다.
연등은 초록으로 물들어가는 갓바위에도 이어졌고, 맑은 공기 속에 목탁 소리와 향내음이 실려 오는 가운데 사람들은 염불을 외면서 부처님 전을 향해 올라갔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작은 발걸음으로 한참을 걷고 또 걸어야 했는데, 두 오빠들은 전에 와 본 길이라서 어머니가 건네준 주전자를 받아들고 둘이 시합하듯이 사람들 속을 헤치며 앞서 올라갔다. 오빠들은 가끔 뒤를 돌아다보며 오는 걸음을 확인하고 숨바꼭질하듯이 다시 내달려가서 보이지 않다가 약수터에서 주전자에 정화수를 담아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부처님 전에 무슨 기도를 드렸을까? 당시 아버지는 직장을 그만두시고 객지로 이사 와서 밑천 없이 장사를 시작하셨고 어머니는 일을 도우며 세 아이를 키워야 했다. 게다가 연로하신 외할머니를 대신하여 장녀로서 늘 친정 동생들을 걱정하고 보살펴주며 쉽게 펴지지 않는 살림을 꾸려나가야 했다.
옛날 아사세 왕이 기원정사에서 부처님께 법문을 청해 들을 때 사람들이 기름 등불을 켜서 법회 자리를 밝혔다. 이때 난타라는 한 가난한 여인이 복을 쌓고 싶었으나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어 안타까워하다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서 기름 한 되를 구하여 등불을 밝혔다. 아침이 되어 모든 불은 거의 꺼졌으나 이 난타의 불만은 꺼지지 않고 밝게 타고 있었다. 부처님께서는“이 등불은 지극한 성심과 큰 원력을 가진 사람이 밝힌 등불이기 때문에 꺼지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고 난타에게 수기를 내리셨다. 이때부터 큰 원력을 세운 사람은 부처님 전에 지극정성으로 기원 봉양하면 무량한 공덕을 입을 수 있음을 깨닫고 부처님 전에 등불을 밝혀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고 자신의 지혜를 밝히게 되었다고 한다.
세상의 많은 어머님들이 부처님께 예경 드리고 법문을 듣고 삶의 위안을 얻으며 가족을 위해 정성을 다 하셨듯이 나의 어머니도 그러하셨는데 이 세상과의 인연이 짧아서인지 가족들의 곁을 일찍 떠나셨다.
모녀간에 다정하게 지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되는 날이면 나는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워져서 마음에 깊은 강물이 흘렀다. 죽음에 대한 문제를 일찍 접하고 방황이 깊어갈 즈음 불교서적을 읽고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중생들에게 깨달음을 주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몹시 그리운 날에 절 앞을 배회하다가 법당 문을 열고 들어가 부처님 전에 엎드렸다. 누구나 생로병사의 길에서 예외인 사람은 없고 죽음을 일찍 맞거나 좀 늦게 맞을 뿐이다. 나는 어머니께서 수행 정진하시며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셨기에 고苦가 많은 이생을 빨리 벗어나 편안한 길을 가셨다고 여기게 되었다. 나는 어머니의 몸을 빌려서 이 세상에 태어나 짧은 동안이나마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음에 감사드리고 한 송이 연꽃처럼 잠시 피었다 가신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기도한다. 법당에 있으면 지난날 어머니께서 밝혀두신 연
등 속의 법 향기에 이끌려 부처님 전에 귀의하게 되었
음을 알겠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등불로 삼으라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라고 하셨다. 이제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야 하는 나는 스스로 마음의 등불을 켜서 자신을 돌아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수행하며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고자 한다.
오색 가득히 펼쳐진 연등의 대열을 바라본다. 부처님의 탄생과 성도를 예경하고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로 이 세상을 잘 살아가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긴 연등들……. 저마다 자신과 가까운 이들을 위해 기원하고 정성을 모아 불을 밝힌 등을 바라보니 법연의 소중함을 느낀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수많은 연등 속에 담겨 있는 부처님의 법 향기가 온 누리에 퍼지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