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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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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피플- 나눔의 사하촌 이야기 - 나눔 2009년 04월 326호
김형달씨 부부 스님들과 함께 가야산을 지키며 해인사를 함께 가꿔온 “치인리 10번지” 사람들. 스님들의 입을 통해 회자되는 이야기가 해인사의 정사正史라면 마을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옛날 이야기는 진한 삶의 향기를 담은 야사野史라 할 수있다. 이유야 어찌됐든 이 곳 사람들은 가가호호 적어도 2-3세대씩 아래로 내려오는 정착민의 역사를 갖고있으니 토박이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마을 역사는 해인사의 또 다른 역사가 되고 있다. 이 곳에서 200년이 넘는 가족사를 대물림하며 살아왔다는 토박이 김형달씨(56세. 삼일식당운영). 그의 기억 속에 담긴 고향 가야산 해인사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외가는 원당암 들어가는 다리께 였고 친가는 공원 앞에 있었어요. 우리 집은 구부락이라 불리는 원치인리 쪽이구요. 지금도 큰 형님이 그 동네 사십니다.”
공부를 위해 잠시 고향을 떠났던 중학 3년을 빼고는 한번도 고향을 떠난 적이 없다는 김형달씨.
올해 나이 쉰 여섯. 이곳에서 부인을 만나 5대째를 잇는 장성한 남매를 낳고 삶터를 이어가니 가
야산과 해인사 역사는 그의 가족사이기도 하다.
“내 어렸을 적이 60년대니까 절이나 마을이나 모두 한가지로 참 많이 어려웠어요. 그때 밥상에 오른것은 대부분 보리죽에 풀죽같은 국수였지요. 보리죽이 너무 껄끄럽고 질려서 먹기 싫다고 밥을 굶으면 어머니가 매를 드십니다. 이거라도 안먹으면 죽는다며 밥투정하는 나를 때리셨어. ”
지금 생각하면 맞았던 자신보다 가난 때문에자식을 때려야만했던 어머니의 가슴에 더 아픈피눈물이 흘렀을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짠하다는형달씨. 그럼에도 어찌된 노릇인지 그저 보리밥이 먹기 싫었을 뿐 가난 때문에 슬프다거나 그래서 도시로 나가 남들처럼 번듯하게 돈을 벌어 잘 살겠다거나 하는 악착같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공부를 한다고 중학교 때 밖으로 나갔거든요. 근데 지병인 천식이 도진거라. 어쩔 수없이 중학 삼년만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요. 그 후로는 돈을 벌겠다, 공부를 하겠다 하는 생각이 안들데요. 공부고 직장이고 모두 도시로 나가야만 가질 수 있는건데 한번 나가서 보고 들어오니까 나가기 싫더라구요. 그저 산에 올라가서 한바퀴 돌면 기분도 좋아지고 건강도 좋고 나무도 생기고 철마다 열매다 버섯에 나물에 ..산은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어요. 산에서 가져 온 것을 쌀하고 바꿔먹고 때때로 절에서일 손 모자란다면 가서 도와주고 하면 그럭저럭 늘 오늘 때거리는 생기거든요. ”
남들 보기에는 세상을 참 마음 편하게 산다고 할지는 몰라도 형달씨는 형달씨대로 삶의 방식 이 있다. 큰 산과 큰 절을 끼고 있는 사람들은 욕심만 내지않으면 절대 끼니 거를 걱정이 없다는게 그의 생각이다. 더구나 유난히 산을 좋아하 다보니 어려서부터 가야산은 그의 놀이터가 되고 골깊고 험하다지만 반평생을 넘기면서 매일 오르내리는 골짜기는 이제 그의 친숙하고 편안한 삶터가 되어버렸다. 남들보다 더 깊고 높은 곳까지 다니면서 더 좋고 희귀한 자연의 것들은 가져오는 남다른 지혜가 열리니 그만큼 생활을 돕게 되었다.
“봄이면 고로쇠 물을 받고 가을이면 송이를 캐서 애들 엄마가 하는 식당에 갖다놓으면 오래 전부터 아시던 분들이나 인근 절에 스님들이 사가십니다. 그걸로 보태서 아이들 키우는거지요”
예전에 비해 생활이 엄청 좋아진거라며 또 다시 느긋함을 보이니 형달씨에게 가야산은 풍성하
고 너른 텃밭인 듯했다.
“송이는 이등이 없어요. 앞 사람이 한번 쫙 훑고 가면 허당이지요. 그래서 송이를 딸 때는 배낭을 지고 밤 10시에 산을 갑니다. 새벽이면 벌써 누군가가 채취를 해가거든요. 그럴려면 어디에 몇 년된 소나무가 있고 그 소나무 주변은 어떻고 하는 것들을 다알아야 밤 길 산행이 가능하지요. 송이가 대부분 40년 이내 소나무 주변에서 많이 나거든요. 나무가 너무 오래돼도 송이가 안나요. 참 신기하지요”
눈감고도 오르는 곳이 가야산이지만 아직도 자연은 그에게 신기함이 많다.
“ 고로쇠도 날이 바짝 추웠다가 사르르 풀리는 그날 물을 내줍니다. 그것도 2-3일 잠깐 나오고 나머지는 물이 없어요. 그걸 말로는 설명할 수없지만 그냥 느끼는거예요. 언제인지 어느 날인지 알 수는 없지만 가만히 산을 바라보며 앉아있으면 지금 물 받으러 가야 된다거나 또는 오늘은 날이 좋아도 가봐야 별거 없다거나 하는 생각들이 그냥 들어요. ”
바람소리, 물소리, 하늘 빛을 보고 자연이 부르는 날, 인심좋게 내주는 물건을 받 듯, 그때 가야
더 많은 것들을 집으로 가져올 수있다는 사실은 자연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낭만적인 산골 사내의 순박한 표현으로 들릴지는 몰라도 적어도 오랜 세월동안 생활에서 익혀 온 지혜에서
비롯 된 것이다.
생활 속에 도가 있다고 했던가. 그가 삶 속에서 알아 온 모든 것들이 둘이 없이 딱 떨어지는 자연의 이치와도 그 맥을 같이하니 가야산은 그에게 깨달음으로 가는 마음공부를 절로 시킨 자상한스승으로 큰 도량의 역할을 해 온 셈이다.
“미나아빠, 미나아빠∼ ”식당을 운영하며 손님을 치러내기 바쁜 부인 현원자씨가 큰 아이 이름자를 따서 부르는 남편 형걸씨의 호칭이다. 산에 가지 않는 날이면 늘 부인 주변을 돌며 행여 힘들새라 궂은 일 마다않고 모든 것을 도와주는 든든한 남편이다보니 어느새 눈에만 안보여도 가슴 한 쪽이 서늘하고 일 손조차 걱정이라는 원자씨. 그러나 갓 시집와서는 그렇게 무능해보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지난 75년 경북 현풍에 살던 아가씨가 가야산에 등산을 왔다가 산길에서 만난 것이 남편 형달씨다. 당시 여고를 갓 졸업한 탓에 소녀적 낭만이 가득했었다. 더구나 제법 넉넉한 집안에서 자란 탓에 가난이 뭔지 모르기도 했다. 형달씨 역시 당시 스물다섯으로 한창 혈기 넘치는 젊음이있는데다 예나 지금이나 산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실력을 인정받던 터라 원자씨의 눈에는 형달씨가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없었다. 원자씨의 소녀적 낭만에 산골 사내 형걸씨의 순박함이 합해져 두사람은 그저 가야산만 있으면 행복이 절로 생겨나는지 알았다.
그러나 막상 시집을 와서 살아보니 현실은 막막하기만 했다.
“나도 산에 가는 것을 좋아하니까 시집와서 처음에는 산에 따라다니며 도토리도 줍고 이곳저곳 들려주는 나무이야기, 꽃이야기가 그리 재밌더라구요. 근데 첫 아이 미나를 낳고보니까 모든 것이 돈하고 직결되더라구요. 근데 남편이 직업을 가질 생각도 않고 그저 산에만 다니는거라. 다른 집들은 관광객들 상대로 좌판을 벌리고 식당 일도 하며 다들 식구들이 달라붙어 사느라고 바쁜데 미나 아빠만은 그런게 없어요. 다행이 시어머니가 절 공양주로 계셨기 때문에 굶지는 않지만 그게 생활은 아니잖아요. ”
사는게 막막하다보니 한때 친정 갈 보따리를 싼 적도 있었다는 부인 원자씨. 그러나 아이들이 눈에 밟히고 경제적인 것 말고는 모든 것을 말없이 받아주는 묵묵하고 착한 남편에 대한 애틋함에 그만 가던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내가 그때 알고 있었지. 그러나 아는 척 말 안해. 가면 가는거지 ”
말로는 남자 자존심에 붙잡지 않았다지만 그렇다고 고통스런 현실을 해결할 마땅한 방법도 없는 처지다보니 당시로서는 그저 바라보는 입장이기도 했다.
“미나엄마가 고생 많았지요. 내 식대로 따르고 살았다면 아마 이런 식당도 엄두를 못냈을겁니다. 처음에 애들 낳고 살 때 내가 산에서 가져 온 것들을저 앞에 주차장에 놓고 좌판을 벌이더라구요. 그런가보다 했지요. 그저 팔거리다 싶으면 더 열심히 산에 다니는 것만으로 내 할 일을 해준거지요. 근데 하루는 요 아래 고깃집을 인수해서 해보자는 거예요. 펄쩍뛰며 반대를 했어요. 모은 돈도 없지만 남들처럼 그렇게 손님 붙들고 옥신각신 경쟁하며 살자신도 없었던거지요. 그게 다 사는 재미인데 나는 그런 것을 몰랐으니까요. 아마 알아도 안했을거예요. 돈을 더 벌겠다. 부자가 되겠다 하는 생각보다는 그저 오래도록 건강해서 산에나 계속 다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더 많았거든요. 애들 엄마가 속이많이 상했을거예요”
그러나 원자씨는 이미 계약금을 치루고 가게인수를 결정하고 난 뒤였다. 그것도 큰 빚을 지어
가며 식구가 일을 벌려놨으니 결국 같이 해결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고 형달씨는 그날부터 산에
가서도 제대로 앉아 쉰 적이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산에 다니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것만도
고맙다는 생각에 산에서만큼은 부지런히 일을 했다. 식당에서 팔 산나물 한다발이라도 더 많이 아내에게 안겨주고픈 마음에서였다.
그렇게 결혼생활 30년. 그 중 20여년이 조금 못되는 긴 시간동안 함께 식당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키워냈으니 돌아보면 어떻게 살아냈나싶다.
“물론 아직도 이 식당 열면서 지은 빚이 제법 남아있어요. 십여년 넘게 갚아오고 다시 지고 하며 생활을 만든 것이니 빚이 있어도 다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제 자신이 어려울 때 손을 내미는게 습관이 안된 사람인데 그래서 별 고맙다는 말조차 변변히 못한 듯한데도 우리를 믿고 큰 돈을 선듯 빌려 준 마을 사람들이 고맙지요. 이제 은행 빚만 남고 마을 빚은 거의 다 갚았으니 애들 다키우고 가게 잘되고 식구들 건강하면 된겁니다. ”
예전에 비해 지금은 잘사는거라며 또 다시 오늘 앞에 넉넉히 웃을 수있는 형달씨. 그런 그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아는 이웃이 바로 해인사 스님들이다보니 한때 세상살이보다 절에 사는 것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라며 당신 상좌를 삼겠다는 스님들도 계셨다. 특히 돌아가신 길상암의 명진
큰스님은 형달씨를 각별하게 생각하셔서 늘 가까이 두며 출가심을 내도록 다둑여 주시기도 했다.
그 무렵 만난 것이 미나엄마.
큰스님은 당시 결혼을 반대한 것은 물론 아이들이 생기고도 한참 동안 원자씨를 밉다하셨다. 최고의 스님이 될 인물을 여인네가 낚아채 가버렸다는 아쉬운 마음에서였다. 스님들의 상좌 욕심은 산중에 하루빨리 눈밝은 공부인이 나와 세상을 온전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아름답고 순수한
발원이기에 누구든 밝고 지혜로운 사람들을 보면 당신 옆에 두고 공부 뒷바라지를 하고 싶어하
신다. 그런 마음을 갖고 사시는 분들이 또한 스님들인지라 자연을 몸으로 익히고 그 이치에 맞
게 살아가는 형달씨는 스님이 맘에 찍어 둔 곱기만한 처사였다.
“ 정작 나는 출가하겠다는 생각을 낸 적이 없음에도 스님 생각에 애들 엄마 때문에 내가 머리를 안깎았다고 보신거예요. 애들 엄마는 그 덕에 큰 욕을 먹게 됐지만 제 입장에서는 스님이 감사한 분입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더 잘 모시지 못한 것이 죄스럽지요. ”
옛 이야기를 하며 다시 가야산 정상을 바라보는 형걸씨의 깊은 눈동자 속에는 어느새 가야산과 해인사, 그리고 스쳐갔던 많은 스님들과의 사연들이 함께 지나가는 듯했다.
멀리서 보면 정상인 우두봉이 연꽃모양을 하고 있어 부처님이 계셨던 부타가야의 이름을 따서 이름 붙였다는 깨달음의 산, 가야산. 그리고 천년 고찰 해인사의 역사 속에 당대 최고의 도인들이 살았고 그 법을 구하고자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이 깊은 산골짜기까지 발길을 이어가니 최고 도량, 가야산과 해인사를 앞에 두고 이웃하며 살아가는 사하촌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것이 웃음이든 울음이든 모두가 한자리 삶의 선방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