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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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김광태
2009년 04월 326호
우리는 세상을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며 마음으로 의미 규정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때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마음이 사실은 하나의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다. 철옹성처
럼 견고해 보이던 어떤 형태의 숭고함조차도 어느 순간 모두가 허깨비다. 손으로 만져지는 거친 질
감, 눈으로 확인되는 사물의 어떤 형태 뿐만이 아니다. 부처와 중생을 나누고, 성聖과 속俗을 구분
짓는 마음의 자취조차도 모두가 분명 허깨비다. 그래서 불교는 우리의 마음으로 조작되는 세간의
일체법一切法이 단연코 마음에서 조작되는 유심조唯心造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객관적인 형태의 실체로 존재한다는 착각을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의 삶
이 고통스러워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달리 말하면 이는 집착의 문제다. 따라서 삶이 평온해질
수 있으려면 마음에 의해 조작된 세간의 일체법이 어느 순간 어떤 대상에 있어서도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분명한 자기 확신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자기 마음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항상 나룻배로 삼아야 하는 부처님의 가장 본질적인
가르침은 삼법인三法印이다. 모든 것은 항상함이 없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어떤 상황에 있어서도
나라고 고집할 수 있는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 그리고 그 제행무상과 제법무아
의 원리를 언제나 자기화시켜 살아갈 수 있을 때 진정한 의미의 열반은 가능하다는 것을 서가모니
부처님은 가르치신다. 석가모니 부처님 뿐만이 아니다. 동양 고전의 하나인 역易 또한 사물의 이치
는 변하고 바뀐다는 그 하나의 명제만이 진정한 의미의 진리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그점에 있어서 탄여의 행적 속에 남아 있는 다음의 고사 내용은 지금의 우리가 매우 깊
이 있게 음미할만한 가치를 지닌다.
탄여는 고려시대의 승려였다.
그는 나이 27세에 동년배들이 부르기 쉬운 별호를 스승에게 청했다.
당시 연복사 주지였던 죽암선사 진공은 그 요구에 응해 환옹幻翁으로 칭하라고 하였다.
탄여의 별호를 환옹幻翁으로 대신한 죽암선사의 취지는 평탄하여 마음 가운데 자기의 독선적인
주장을 내세워 대립된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의 밖에 어떤 경계를 따로 두지 않기
를 바라는데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필경 마음이 평온해져 당사자의 일상사에서 마음이 항상 본
질적인 이치에 부합하여 바깥 사물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출처는 원각경의
보현보살장 및 금강경 등이다.
죽암선사는 이런 취지로 탄여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너는 세계를 보아라. 환幻이 아니냐.”
“예 환幻입니다.”
“몸도 마음도 환幻이 아니냐.”
“예 환幻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교주와 제방의 여러 선지식도 환幻이 아니냐.”
“예 환입니다.”
“네가 말하고 네가 듣는 것도 환幻이 아니냐.”
“예 환幻입니다.”
죽암선사는 여기서 하던 말을 마치고 탄여가 그 의미를 좀더 깊이 있게 깨닫게 하고자 그를 이
색에게 보냈다.
권근, 김종직, 변계량 등을 문하에 배출하며 조선 성리학의 발전에 적극 기여한 이색은 당시 연
복사의 죽암선사 진공과도 깊은 교류가 이어져 오던 터였다.
탄여를 맞이한 이색은 죽암선사가 진실로 여如와 환幻의 취미를 얻었음을 칭송하고, 자기는 불교
를 배우지 않아 깊은 이치를 알지 못하겠다고 사양하며 상대방 탄여의 견해를 도리어 캐물었다.
이에 탄여가 다음과 같이 응대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기세간器世間이요. 중생은 정情으로 살아가는세간世間이며, 부처는 바른 깨침으로 살
아가는 세간世間이다. 이 세 가지가 서로 융화하여 막힘이 없는 까닭에 여여如如의 지혜가 항상 홀로 비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라는 것은 모두 환을 쓰고 살아가는 것이 된다. 여如가 아니면 환幻을 구할 수가 없고
환이 아니면 여를 구할 수 없으니, 어찌 이치와 현상의 경계가 혹시라도 서로를 빼앗는 일이 있겠는가.”
이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차별이 없음을 말하는 화엄경의 이치 그대로다.
이에 이색은 이렇게 답했다.
“그대는 진실로 안목을 갖춘 선비라 하겠다. 내가 그 말을 관찰하니,
하나는 진여眞如가 곧 환幻이란 말이요,
또 하나는 장차 환幻이 진여眞如라는 말이다.
처음에 환으로 보면 만물이 있고 내가 있으니 / 이는 상대로써 세상을 보는 것이요.
마침내는 진여眞如가 장차 환幻인데 그렇게 보면 사물도 없고 나도 없으니 / 이는 상대가 없는 안
목이 된다. 이렇게 사물과 나를 모두 잊어버리면 마음과 자취가 둘이 없게 되니 이것이 바로 지극
한 도의 안목이다. 다른날 환옹이 편안히 앉아 바로 생각하여 만약 그 설에 대해 얻는 바가 있게 되
면 오늘의 말이 옳고 그른 것을 나에게 알려 달라. 나는 마땅히 허심탄회하게 듣겠다.”
탄여를 맞아 이색이 당부하던 앞의 한마디, 이는 사실 지금 이땅의 우리들이 기억해야 하는 더
없이 소중한 가르침이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이 달라도 결코 변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곧 지금 이 시대 우리들의 좌우명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