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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총림 소림선원 열중 효담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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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박경희 2009년 04월 326호
효담스님 대중생활을 하며 좀처럼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선방의 수좌스님들이 개인 시간을 갖는
시기가 바로 3개월간의 해제 기간이다. 이 시기 스님들은 휴식과 함께 지난 공부를 점검하며 제각기
또 다른 개인 수행에 들어가신다.
지난 2월9일(음력 1.15). 해인사 선원인‘소림선원’에서 겨우내 참선하며 동안거를 치루신 수좌 스님
들이 모두 마흔 세분. 그 중 한 분인 열중 소임의 효담 스님을 만나봤다.

스님이 계신 곳은 경남 산청군에 위치한‘황매사’. 효담스님이
해제 때마다 찾는 토굴(스님들의 개인 수행처)로 지리산 천황봉이
마주보일만큼 높은 황매산 정상 부근에 자리한다. 전국에서 가장
외진 곳만을 연결하고 있다는 59번 국도변에 있는 전형적인 외진
산골 마을을 지나 또 다시 인가없는 산길로 오르노라니 멀리서 포
크레인 소리가 취재진을 맞는다.
벌써 5년째 도량 공사를 하고 계신다는 스님. 해제때 마다 직접
혼자 일 손을 놀리다보니 며칠이면 마칠 작은 공사도 대부분 한두
달은 족히 걸린다. 요즘하고 있는 일은 연못공사. 제법 넓직한 연
못임에도 일꾼은 달랑 스님 혼자. 그나마 포크레인으로 기계적 도
움을 받으니 다행이라 여긴다.
“ 포크레인은 열 사람 몫을 하니 비싸도 어쩔 수없이 빌려서 써야하지만 그외 사람 손을 거쳐도 되는것은 아무리 힘들고 시간이 걸린다해도 직접합니다. 절약도 중요하지만 노동을 통해 얻는 여러가지 잇점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이렇듯 직접 삽과 곡갱이를 잡는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스님만의 또 다른 수행이자 최소한의
양심이라고 했다.
“ 외호대중이나 많은 제가불자님들의 시주 덕에 상구보리 하와중생의 뜻을 품고 선방에 앉아 몸 편안하게 참선 수행을 하고는 있지만 인간인지라 때때로 마음이 무겁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자는 얻어먹고 살라 하셨지만 현실에 부딪히면 괴롭지요. 자기 공부 자기가 하는 것인데 아무리 세상을 구하는 큰뜻을 세웠다고는 하나 사지육신 멀쩡한 내가 왜 얻어먹고 살아야하는가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 때
가 많습니다. 번뇌지요. 그럴 때 노동을 하면 다소나마 위안이 됩니다.”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 스님들이 쓰는 모든 돈은 정성이 담긴 보시금들로 힘들고 귀찮다는 마
음으로 몸을 편케하기 위해 그 돈을 쓴다는 것은 옳지않다는 생각과 보시에 대한 감사함이 스스
로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 저 뿐만이 아니라 모든 스님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다고 봅니다. 양심에 해당하는 인간적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님이 된 이상 하루 빨리 깨달음을 얻고 도인이 되어야한다고 누구나가 생각합니다.
초조하지요. 그런 긴장감 속에서 나온 수행의 방편들이 바로 용맹정진이다, 장좌불와다 하는식의 자기 몸을 극한 상황으로 몰아 놓으며 정신력을 배가시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방편이고 수행 과정이지 깨달음을 얻는 정답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깨달음이라는 목적에매여 노력하는 과정이나 일상을 소홀히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생활에 충실하며 계절이 오는 시간에 맞춰 일상을 살아내는 그 평범함 속에서 수행심을 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수행자의 자질이 생겨나는 것이라 스스로를 정리하고 오늘을 살아간다는 효담스
님. 그러기에 해제 때마다 토굴로 돌아와 이렇듯 마을 사람들의 삶과 같이 자신에게 주어진 의식
주의 현실 문제를 직접 해결해 나가는 것에 커다란 만족을 한다고 했다. 수행자는 안거철보다는
산철이 더 중요하다는 스님.
“ 참선은 계정혜 중에서 정을 닦는 수행입니다. 그런 수행을 집중적으로 하는 것이 바로 하안거, 동안거와 같은 결제기간이지요. 그러나 정만 가지고 수행을 완성 시킬 수는 없다고 봅니다. 정이란 어떤 것에 엄청 집중할 때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때 자아가 소멸됨을 느낍니다. 자아는 생각, 언어, 느낌등을 전두엽이 종합해서 만들어낸다고 봅니다. 그 자아가 고통의 원인이죠. 그러나 정에 들어서는 살수가 없어요. 일상생활이 안되는 거죠.
그래서 삼매에서 빠져 나왔을 때도 정에 들어있을 때와 같은 마음가짐을 유지할 수 있어야 됩니다. 즉 혜가 같이 가야합니다. 혜는 반야, 지혜로서 무아(無我), 공(空)에 대한 확실한 체득입니다. 이것은 어느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아니라 생활 속에서 경험을 통해 느끼면서 얻어지는 것이라 봅니다. 물론 전제가 부처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이를 참구하며 정에 드는 습관들이 몸에 베어있는 상태를 전제한다면 말입니다. 계정혜가 별도로도는 것이 아닌 하나거든요.
그 실천의 장이 바로 생활이다보니 조사스님들이 간화선을 생활선이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저 역시도 이 삽자루에 의지해 땅을 파고 돌을 나르면서 생활선의 참 뜻을 익히게 됩니다. 삼매라는 것이 좌선할 때만 드는 것이 아니라 뭔가 자기일에 집중할 때 그리고 그 마음이 일심으로 간절하여 진지할 때 이뤄지는 정신 적용이라 보거든요”
결제와 해제때마다 이렇듯 반복되는 선원에서의 참선과 토굴에서의 노동은 수행자로서 사는 스님에게 삶의 균형감을 주는 듯 싶었다. 그리고 여기서 한단계 더 나아가 보살심을 내어보니 오늘의 노동은 고통이 아니라 행복이라고 한다.
“ 내 손으로 가꾼 도량에 와서 누구든 편안하게 쉬고 기도하게 된다면 그게 다 감사함이지요. 그러다보니 앉았다가도 눈에 거슬리는 뭔가가 있으면 벌떡 일어나 다시 일 손을 놀리게 됩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시킨다고 들은 사람들이 아닌게 스님네들입니다. 그저 스스로 하는거예요. 마음이 편해지려는게지요.
선원에서는 참선을 하며 화두를 들고 있어야 마음이 편하고 이곳 토굴에서는 내 몸을 움직여뭐 하나라도 반듯하게 만들어놔야 내 맘이 편하니 마음자리 따라 사는 겁니다. 그게 행복이지요.”
5.18광주 민주항쟁이 나던 해는 스님이 대학을 갓 입학했던 시기였다. 연일 반정부 데모가 줄을
잇고 진실을 외치던 친구들은 정권에 항거하다 경찰에 끌려가곤 했었다. 당시 이를 바라보며 스님은 젊음이 갖는 열정과 현실에서 오는 책임감을 두고 오랜 방황을 겪었다.
“ 친구들의 저항이 옳은 길이니까 나도 친구들과 같이 시대를 개혁하자고 뛰어들어야만하고 그로인해 같이 끌려가야 마음이 편한데 늘 부모형제의 얼굴이 마음 한쪽을 자리하니 그 갈등은 말도 못했죠.
결국 격정과 갈등을 못이기는 몸은 병이들고 위천공까지 가는 중증 위장장애를 앓곤 했습니다. 옳은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젊음이란 것이 얼마나 비참한가 늘 괴로웠고 생각은 더욱 더 염세적으로 변해갔습니다. ”
그즈음 스님에게 다가선 것이 깨달음으로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상구보리 하와중생’이라 하지 않았던가. 출가는스님을 발목잡힌 현실에서 구제해 준 하나의 탈출구가 되었고 여느 스님들의 출가심과 다를 바없이오직 깨달음만이 전부인 듯 확철대오를 꿈꾸며 용맹정진을 계속해왔다.
“ 그러나 이제 법납 이십년이 넘으면서 용광로 같던마음들이 정리됩니다. 수행은 그 자체로 생활이 되지않으면 깨달음도 없다는 새로운 확신이 생긴 것이지요. 간화선의 요체인 생활선의 진정한 의미를 느끼게된 것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면서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수행에 대한 조바심으로 몸을 헤치거나 마음을 닫게 만드는 행위를 경계하게 되더라구요. ”
수행에 대한 조바심을 내려놓으면서 스님은 여행을 시작했다. 그간의 긴장감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새로운 수행을 시작한 것이다. 좌선과 함께 병행할 새로운 공부거리를 세상에서 찾아보는 만행.
동안거를 마친 요즘 같은 봄철에는 직접 지게를 지고 산을 돌며 1년동안 사용할 땔감들을 미리 준비하고 먹거리 농사를 하고 도량을 정리한다. 그리고 다시 선방으로 돌아와 하안거를 마치면 늦여름에서 가을까지는 내내 여행을 떠난다. 때론 노숙도 마다않는 조촐한 배낭여행이지만 스님에게는 매주 중요한 연중행사로 이제 일상이 되었다.
“ 여행을 하게 되니까 여러가지 좋은 게 많아요. 일단 견문이 넓어지다보니 생각의폭도 넓어지고 수행자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제접 여유를 찾은 듯합니다. 그리고 생활면에서는 현실감이 생겼지요.
여름을 위해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미리미리 계획하게 되고 또 알뜰하게 살아내며 저축을 하게 되더라구요. 수좌들에게 들어오는 돈이라야 뻔한 해제비이고 이를 아껴 여행비로 남겨놓다보니 자연스레 일상은 청빈한 모습으로 정리가 되고 여행을 위해 체력을 키우다보니 운동도 열심히 하게됐어요. 일단 건강하고 부지런해진거지요. 건강한 몸은 수행자들에게는 가장 큰 행복이지요. 몸뚱이 하나가 전 재산인데건강이 있으니 큰 부자가 된 것입니다.” -웃음
수행을 하셨던 옛 어른들은 알음알이를 경계하라 하셨지만 스님은 이에 대해서도 나름의 생각
을 갖고 계셨다
“ 지금은 정보화 시대입니다. 옛날처럼 의식주를 농사에 의존하며 단순반복되는 육체 노동만으로 해결해 나가는 시대가 아닙니다. 또 요즘의 책은 옛날 서적처럼 사람사는 도리를 가르치는 관념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체험적 지혜가 정보로 공유되도록 기능적 측면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현실을 보는 안목들이 키워지고 많은 정보를 데이터로 합리적 사고를 하는 신도들이 늘면서
의식들이 날로 깊어지고 세련되어집니다. 이에 우리 스님들이 과연 깨달았다한들 대화가 되겠습니까?
의식을 선도했던 것이 옛 스님들이라면 지금은 세상을 따라가기도 힘듭니다. 옛 스님들도 불립문자라
하신 것은 너무 문자에 매여 탁상공론으로 세상을 허송세월하는 허망한 논객들을 두고 나온 말이라 봅
니다. 문자에 매여 현실을 놓치지 말라는 지엄한 꾸중으로 새겨야지 이를 글자 그대로 책보지 말라는 것
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세상을 역행하는 것이라 봅니다.”
최근 깨달음 지상주의에 빠진 한국 선방의 분위기는 자칫 한국 불교 발전과 대중화에 소모적인
역할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와 함께 이미 젊은 수좌 스님들 사이에서도 심각하게 고민하는 문
제가 돼버렸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는 변화된 수행에 대한 갈망들이 하나 둘 모이면서 스님이 고
민하는 생활불교와 생활선에 대한 대안들도 여러가지 모습으로 제기되고 있는 현실을 스님은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있다. 그러나 그 또한 너무 한 곳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우려가 함께 한다.
“ 깨달음은 정신의 작용으로 뇌과학과도 밀접하다는 학설들이 최근 대두되고 있습니다. 특히 그간 알수없는 그 무언가의 신비로움으로 해석됐던 삼매 즉 정의 요체에 대해서도 과학적으로 증빙되는 실험들이 나오고 있지요. 그런 견지에서 보면 수행은 반복되고 고뇌하는 오랜 과정을 통해 느껴지고 그 느낌들이 지혜의 대열이 올랐을 때 비로소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란 공식이 성립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지혜라하는냐...반야라하는가.. 공을 체득하는 거라 봅니다. 그럼 공이 뭐냐할 때 중도를 설명하면되는 거지요. 이런 것들을 잘 이해하는게 결국 지혜 아닙니까. 그리고 그 지혜를 사회 실천을 통한 세상에 베풀 줄 아는 것으로 비로소 종교의 가치가 존재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논리적이 틀을 우리 불교도가져야 할 때가 아닌가 봅니다. 계정혜 그 어느 곳에도 치우침 없는 중도적 입장에서의 얘기들이 나와야하는데 그것은 수행이 일상으로 생활선이 되어야 하지않나 생각해봅니다.”
오늘을 사는 수행자로서 늘 새롭게 깨어있고자 노력하는 스님의 모습을 뵙고 돌아오는 길. 노을
짙은 황매산 아래로 저녁짓는 굴뚝연기가 피어오르고 하루를 마감하는 마을사람들의 조용한 일상
이 수행자의 향기처럼 곱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