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인사의 호국팔만대장경 정대불사 49주년을 맞아 해인사의 산 증인이신 종성 큰스님을 모시고 지난 얘기
를 들어보았다. 국태민안 민족화합 경제안정이라는 정신아래 치루어지는 정대불사는 팔만대장경이 몽고침입
에 대한 항쟁의 상징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번행사는 4월 11일 오전 10시부터 해인사 대
적광전 앞마당에서 봉행된다.
대담 : 종성 큰스님(해인사 홍제암 감원)
박경희 (월간 해인 편집장)
편집장 : 환절기를 맞아 큰스님 건강이 어떠한신지요? 큰스님께서 해인사에서 가장 오래 사셔서 누
구보다도 정확하고 풍부한 애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이렇게 찾아 뵈었습니다. 호국팔만대
장경 정대불사가 올해로 49주년을 맞는데 처음에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종성스님 : 일제 때 해인사도 여느 다른 절처럼 대처승들이 거주했는데 불교정화운동을 통해서
1955년 이후 비구승들이 살기 시작했어요. 성철스님이 초대주지를 했고 자운스님, 청담스님
이 주지를 사셨는데 그때는 절의 살림이 몹시 어려웠습니다. 스님들은 탁발을 다녔고 강원 학
인들은 자기 양식을 다 가져와서 공부를 했어요.
편집장 : 정대불사가 새로이 시작된 것인가요 아니면 그 이전에 어떤 원형이 있었습니까?
종성스님 : 그 이전에 왜정 때 해인봉찬회가 있었습니다. 봉찬회가 팔만대장경 판경을 수호하고 판
경을 지키는 모임이었어요. 그 회가 이름을 바꾼 것이 호국팔만대장경정대불사입니다. 영암스
님께서 총무를 하시면서 일제 식민을 청산하고 팔만대장경에 담긴 호국 정신을 다시 세운다는
의미로 정대불사로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1959년도에 처음으로 정대불사를 해서 지금까지
해오는 것입니다. 올해로 49번째니까 반세기를 해온 불사입니다.
편집장 : 정대불사 초창기 얘기를 들려주세요.
종성스님 : 첫회에 했을 때는 사람이 백명 좀 넘게 넘어 왔어요. 첫회를 그렇게 했어요. 그 다음에
는 보경당 앞마당에 있는 해인도의 네개 구역 중 두 구역이 차더라고요. 그다음에는 세 구역
이 차고 그다음에는 네 구역 모두가 찼습니다. 차차 이렇게 정대불사가 발전해서 1980년대는
얼마나 많이 왔던지요. 그때 제일 많이 왔어요. 경찰관도 많이 오고 굉장히 힘들게 치르고 했
었어요.
편집장 : 그럼 봉찬회는 일제때부터 내려오는 것이었는데 정대불사로 바뀌면서 달라진 것은 없었
습니까?
종성스님 : 봉찬회는 법회만 했어요. 날짜도 지금과는 달랐죠. 장경판을 이는 것도 없었던 걸로 알
고 있어요. 일년에 두 번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대불사는 일년에 한번이죠. 구월불사 때
는 수계하고.
편집장 : 정대불사 할 때 신도들한테 맨 처음에 어떤 의미의 불사다, 이러한 의미가 있으니까 이 불
사에 동참하라고 얘기 했을텐데 어떻게 말씀하셨나요?
종성스님 : 부처님 모습을 그대로 모셔놓고 절을 하고, 사리탑이나 불탑을 조성해 모시니 글도 모
르고 하는 사람들은 위문받고 이런 인연으로 무한한 공덕을 받는다하지 않습니까? 팔만대장
경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내용인데 그것을 우리가 머리에 정대를 하니, 실제로 읽지는 아니하
더라도 무량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편집장 : 맨 처음에 작법 만들때 어딜 기준을 해서 만들었습니까?
종성스님 : 장경판전을 기준했어요. 4회, 5회까지는 장경판전만 했을 겁니다. 그 이후 워낙 많이 오
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보경당 앞마당으로까지 내려왔어요.
편집장 : 머리에 경판을 이고 장경판전만 걸어서 돌았군요?
종성스님 : 처음엔 그렇게 했다가 워낙 사람이 많이 오니까 할 수 없이 사무실에 경판을 갖다 놓고
해인도를 돌고 내려 놓는거죠.
편집장 : 그때는 직접 팔만대장경 경판을 꺼내서 머리에 이고 판전을 돌고난뒤 갖다 놓는거였나
요?
종성스님 : 아니요. 책을 가지고 했어요. 책! 모두 6,791권인데 판전 한가운데 보관돼 있어요. 그 책의 조사 및 보완이 잘되어야 합니다. 어떤 때는 화엄경 가지고도 했습니다.화엄경은 해인사 사
간판을 인경한 것인데 고려각판이라고도 합니다. 그게 대장경보다 300년 앞섰어요.
편집장 : 책 이고 다니는 것이 언제부터 경판을 직접 이고 다니는 걸로 바뀌었습니까?
종성스님 : 경판 이고 다니는 건 명진스님 주지 때부터입니다. 한동안은 또 화엄경을 찍어가지고
인쇄해서 화엄경으로 한참 하다가 판으로 하는 걸로 바뀌었습니다.
편집장 : 정대불사가 반세기가 되어가고 횟수로는 49회를 거듭하니 이제는 사람들이 이제는 정대
불사를 해인사에서 매년 하는 걸로 기다리기도 합니다. 특히 노보살님들 같은 경우에는 꼭 와
야되는 걸로 알고 있더라구요. 예전이랑 달라진점을 말씀해주세요.
종성스님 : 매년 음력 3월 9일부터 10일까지 했었는데, 4월 두번째 토요일로 양력으로 정하면서 하
루로 줄었어요. 요즘 모두 사는게 바쁘다보니 현실에 맞게 하루 행사가 돼있지요.
편집장 : 예전 모습이 훨씬 거룩한 법회 같았겠네요.
종성스님 : 그렇습니다. 1박2일로 할 때는 신도들이 절에 하룻밤을 머물면서 스님들이 수행하는 모
습도 보고 큰 귀감을 삼았는데 지금은 오전에 금방 와서 행사하고 오후에 가버리니까 허전하
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편집장 : 자료상으로 1박2일로 하던 옛 방식에선 비석거리에서 입재하고 다섯명 번을 쭉 세우고 또
해인삼매 법문이 있었거든요. 저녁 7시 해인삼매 법문에 큰스님들이 와서 법문 하셨을텐데 특
별히 기억나시는 큰스님이 있습니까?
종성스님 : 비석거리에서 입재하고 번을 들고 행진한 것은 돌아가신 명진스님이 만든 것입니다. 법
문은 세분을 청해서 했는데 그것은 영암스님이 총무하시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해인사에
연고가 많으신 어른들, 예를 들자면 주지스님, 학장스님 이런 분들이 법문을 했어요. 왜이렇
게 했느냐하면 이분들이 해인사에 오래 사셨으니 누구보다 대장경과 해인사에 대해 많이 아
시는 거에요.
편집장 : 옛 행사기록에 보면은 비석거리에서 번도 가지고 올 때 태극기도 하나 들어가 있던데요?
종성스님 : 불교행사에 태극기는 잘 안쓰는데 명진스님 말씀에 의하면 나라가 없는데 불교가 어딨
냐 이거에요. 우리가 이 나라에 사니까 우리가 부처님을 모실 수 있는 것이죠. 대장경도 몽고
침입을 이겨내기 위해서 250여년에 걸친 대장경 판각이라는 대불사를 일으킨 것이잖습니까?
편집장 : 명진스님이 주지 사실 때 민족정신을 많이 강조 하셨나보죠?
종성스님 : 강조도 많이 하시고 부처님에 대해서도 그만한 이가 없습니다. 일찍 돌아 가셨지만...
제가 명진스님 만난 때가 16살이었어요.
편집장 : 이번에 정대불사가 반세기 가까운데 홍보를 해야하자나요. 예전에는 어떻게 홍보를 했
습니까?
종성스님 : 종무소에 소임보는 여러 스님들이 나서야 합니다. 1980년대 사람들이 정대불사에 많
이 온 이유도 전국에 각 시도에 절에 찾아가서 주지한테 가서 사정이 이러저러하니 도와달라 우리가 벽보를 붙이겠다하고 이야기하고 허락을 받아 유인물 붙이고 벽보를 주고 그렇게 우리가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몇 년을 그렇게 했죠.
편집장 : 많게는 몇 군데 붙이셨어요?
종성스님 : 그때는 전국에 다 했다니까. 전국에다 다니면서 학인스님들과 소임보는 스님들이‘너는 경기도로 가라 너는 어디로 가라’하면서 다 맡겨가지고 했어요. 그 생각을 낸 분이백련암 원천스님입니다.
편집장 : 강원 시절 얘기 잠깐 해주세요.
종성스님 : 우리 어릴 때는 산에서 흙 파와서 담장쌓는 일로부터 모든 걸 우리가 다했어요.
담장잘못 되면 벌도 서고... 밥도 우리가 하고 반찬도 우리가 하고 밥 배달하는 것도 우리가 다했어
요. 학인스님들이 재무, 회계 등 종무소 소임도 다 살았어요. 재가자 종무원들이 없었죠.
편집장 : 공부하랴 그거하랴 바쁘셨겠어요?
종성스님 : 사시공양하고 1시까지 자유시간이라. 지금 운동장이 좋죠. 그땐 운동장이 삐딱하니 했
는데 거기 가서 볼 차고 축구하고 들어와서 공부하고 강론하고 나면은 3시부터 일해야 해요.
4시30분까지 일하고 마치고 들어와 30분 동안 씻고 들어와 저녁 먹고 예불 모시고. 예불 모시
는데 1시간 걸리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시간은 하루 4시간 보면 되요. 매일 우리가 절의 관
리를 다했죠. 그때는 전부 우리가 다했어. 그때는 많이 살지도 못했어요. 현재는 200명 가까
운 스님들이 있지만 당시는 양식이 없으니까 많이 있어야 80명 살았어요.
편집장 : 해인사의 역사가 학인스님들의 역사이기도 하네요. 지금 해인사하고 그때 해인사하고 많이 달라졌네요. 학인들이 지금은 돈까지 받고 공부하지 않습니까?
종성스님 : 그런게 어딨어요? 불사는 당연히 학인들이 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고 보시가 어딨습니
까? 잘못된 관행이며 개선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편집장 : 가야산 해인사에 대장경이 보관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종성스님 : 가야산을 삼재불입처라 합니다. 여기는 난을 만나지 않는 곳이다, 일제 때 일본인들도와서 살기는 살았지만은 난리를 치지 못했다는 말이죠. 여기서 큰 전쟁을 치르지 않았어요.
6·25때도 인민군들도 들어왔지만 교전하거나 싸움은 안했지요. 그래서 이쪽으로 온 것입니
다. 또 그 다음에 여기는 기운이 되게 추운 곳도 아니고 더운 곳도 아니라고 해요. 가야산은 북
쪽이 가리고 동남쪽이 터졌어요. 그래서 아무리 차가운 바람이라도 동남바람은 그렇게 차가운
바람이 아닙니다. 북바람이 춥지요. 북쪽이 가려있기 때문에 한겨울에도 그렇게 안 춥습니다.
전국을 보면 해인사가 제일 평균기온이라고 하거든요. 여기가 남북한 통해서 기운이 중한 기
운입니다. 복판이지요. 그래서 나무판질이 변형없이 오래 보관되기에 좋다고 합니다.
편집장 : 가야산은 삼재불입처라고 하지만 맞은 편에 있는 남산이 불기운이 강한 탓인지 조선 후기에만 해인사에 일곱 번이나 불이 났다는데 팔만대장경은 한번도 불이 안났어요, 바로 앞에 있
는 대적광전이 타는데도 장경판전은 보존되었는데 그 이유가 무얼까요?
종성스님 : 부처님의 가피입니다. 지금은 판전을 몇 번 고쳐서 그 흔적이 없어졌는데, 약 200년 전에 대적광전 탔거든요. 지금 들어가는 문 입구 문 서까래 앞부분이 타서 들어간 부분이 있었고
수다라장도 조금씩 그을린 부분이 있었습니다.
편집장 : 스님께서 계실 때도 불난 적이 있었습니까?
종성스님 : 사중에 암만 급한 일이 있어도 산에 불나면 불끄러 가야 해요. 해인사에서 불끄면서 나뿐만 아니라 그때 학인들 다 죽을 뻔 한적도 있어요. 지금 길상암 있는데 불이 났는데 밤에 불이 났는데 불끄러 간다고 밤이니까 불만 보고 불끄러 간거에요. 다 끄고 나니까 캄캄하니 어두
운 밤길에 안죽고 내려온게 다행이라. 그 당시에 손전등이 있어 뭐가 있어.
편집장 : 뭘로 불을 끄셨어요? 바케스로 물을 날랐습니까?
종성스님 : 그땐 바케스고 그런 것도 없고 장도리니 까꾸리니 하는 것뿐이지.
편집장 : 그럼 맨몸으로 하는거 아녜요? 그럼 화제로 다치신 스님도 많으셨겠어요.
종성스님 : 죽을 뻔도 했다니까! 사실 그래서 해인사에서 축구를 많이 하게 된 것입니다. 불끌려면다리 힘이 좋아야 되거든요.
편집장 : 저도 축구 좋아해요. 전 골키퍼요... 정말이지 팔만대장경과 해인사의 보존을 위해 스님들의 뼈저린 노력이 있었음으로 해서 수많은 화재 속에서도 장경판전이 보존된 것임을 조금이
나마 느끼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해인사는 이런 것이 해인사다 라고 스님께서 생각하신게 정
리된 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시죠.
종성스님 : 나는 이 도량이 정말로 우리 한국에서 제일가는 도량, 누구든지 여기 와서 정진할 수 있는 그런 도량이 되주기를 원합니다.
옛날에 조선 때 박문수가 스님들이 맨날 노동도 아무것도 안하면서 밥먹고 잘살고 하니까 하
는 이 사람들이 무슨 복으로 이렇게 사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전국에 암행을 다녔단 말이에
요. 스님들 사는걸 조사하면서 다녔단 말이에요. 가는곳 마다 절을 잘 지어 놨단 말이에요. 명
당자리에 절을 지어 놓고. 그러나 이것들 별거 아니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마지막으로 어디 갔
는가 하면 오대산 상원사 중대를 갔어요. 거기서 박문수가 탄식을 했단 말이에요. 이렇게 자신
의 조상을 좋은 곳에 잘 모시고 있으니 어찌 스님들이 잘 안살 수가 있냐 그래서 거기서 탄식
을 하고 부처님께 귀의했다는 말이 있거든요.
나는 우리 해인사가 좀 그런 곳이었으면 좋겠어 정말로 부처님의 법보를 모시고 하는데 정말
로 부처님 법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요즘 현 시대가 암만 좋다지만 옛날 선조들이 하던
그걸 못따라가요.
편집장 : 큰스님, 긴 시간 간절한 말씀 정말 감사드립니다. 후학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