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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물리학의 개념과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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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박광서 1990년 11월 105호
동양문화에서 불교는 사상적인 면에서나 종교적인 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물질세계를 다루는 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마음이나 정신세계를 다루는 불교가 현대산업사회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상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면, 이는 불교사상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나온 잘못된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불교사상 중 자연과 인간의 이해에 핵심이 되는 연기론적 입장이 자연과학 특히 현대물리학의 개념들과 어떻게 모순 없이 어우러지는가를 밝힘으로써, 불교가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과학적 사고를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뿐 아니라 현대과학시대의 우수한 사상체계로 우뚝 설 수 있는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종교가 정신과 의식, 나아가서 초월적인 것을 추상적으로 다루고 있는 반면에 자연과학이 물질세계를 실험적 검증을 통해 분석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우주의 생성 및 물질간의 상호작용방식 그리고 생명과 인식의 본질 등을 추구하던 20세기의 과학자들 특히 물리학자들은 종교와 과학이 결국 만나게 되리라는 가능성을 보여주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견해는 단순히 희망사항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현대물리학의 발전이 이루어낸 이론이나 양자이론 등과 같은 기념비적 업적에 의해 입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대물리학의 개념들과 불교가 어떻게 비교되는지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전에 먼저 불교의 연기론적 입장을 대략 살펴보기로 하자. 불교의 자연관에 의하면 모든 현상은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러한 결과를 초래하는 근본 원인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인과론은 모든 과학의 기본입장과 궤를 같이 하고 있으며, 업보사상이나 윤회사장은 바로 이 인과론의 개체적 또는 사회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불교의 존재론이나 인식론에 의하면, 어떤 사물이나 인간도 완전히 독립된 개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없고 다만 다른 사물들이나 인간들과의 상호작용이나 관계로서만 존재하고 인식된다고 한다. 예를 들어 ꡐ나ꡑ라고 할 때 나를 나 자체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상식적으로 나 그 자체는 아니라고 믿어온 것들, 또는 그런 것들과의 관계로서만 나를 특징지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름․성별․생김새․직업․신분․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이 모든 것들은 나의 본질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나를 설명할 유일한 방법이거도 하다.
이와같이 ꡐ나ꡑ라는 것은 처음부터 인식과정을 떠나서는 실재(實在)하지 않고 필연적으로 상호작용을 거쳐야만 인식되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ꡐ나ꡑ라는 개념은 자체로서 파악될 수 없고 이런 관점에서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를 주체가 없다고 한다(諸法無我). 이러한 관점은 비단 인격체인 ꡐ나ꡑ에 대해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인식하는 유형무형의 모든 삼라만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모든 존재의 실체가 없으므로 모든 현상은 한 순간도 정지해 있지 않고 쉴새 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변해가고 있고(諸行無常), 인간의 모든 고통과 문제들은 바로 이러한 무아와 무상의 원리를 체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생기는 탐욕․집착․무지에서 연유한다(一切皆苦).
따라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으며, 이 우주 안의 그 어느 하나도 서로 연관성이 없는 것은 없다는 확신이 자각의 실체이며 불교의 연기론적 입장이다. 유형의 모든 사물들은 물론 무형의 모든 정신작용들도 그물코와 같이 서로 얽혀 있어서 그 중 어느 하나만 움직여도 다른 모든 것에 영향을 주게 된다. 따라서 이 우주안의 모든 것을 한 덩어리, 한 생명체인 유기적 공동체로 파악하여야 한다. 하나의 유기적 공동체로
파악된 ꡐ나ꡑ는 무아(無我)가 아니라 우주적인 전아(全我)로서 자아개념의 무한한 확대를 의미하고, 유한이 아닌 무한한 확대란 오히려 그 전아라는 관념마저도 부정하는 철저한 초월을 밀하며 자연과의 합일도 이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부단히 변화하는 모든 상대적 현상 그 자체가 바로 절대적 실상임을 확신함으로써 있는 그대로 완전한 자유 즉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 대체적으로 기술한 불교의 연기론을 좀 더 구체적으로 현대물리학의 사고체계와 비교하면서 그 함축된 의미나 철학성을 밝혀보기로 하자.
첫째, 모든 사물은 상호의존적 관계로서만 인식되고 그 관계 속에는 인식행위인 마음이 반드시 작용한다는 것이다.
물리학에서도 역시 사물들간의 상호작용이나 측정될 수 있는 두 양(量)의 관계를 다룬다. 즉 ꡐ무엇ꡑ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으며 그 무엇이 ꡐ어떻게ꡑ 행동하고 그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인 혐의 관계 또는 법칙은 어떠한지를 밝혀내고자 한다. 또는 소립자들의 세계인 극미현상에서는 물질과 물질간의 상호작용 뿐 아니라 관찰행위 자체도 자연현상에 영향을 주게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예를 들어 전자들이 실험상황 또는 인식행위에 따라 입자나 파동의 두 가지 다른 특성을 나타내는 것처럼, 인식과정을 떠난 독립된 주체 즉 ꡐ자아ꡑ라는 것은 본래 없고 끊임없이 출렁거리는 상호작용과 관계만이 존재한다는 연기론적 입장은 현대과학적 해석으로도 설득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어떤 존재에도 절대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삼라만상의 모든 개체들은 다 연관성이 있고 각각 대등한 존재로서 그 어떤 사물이나 인격체도 완전히 독립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없다. 따라서 이러한 불교의 절대평등의 경지에서는 부처도 신(神)도 절대자일 수 없다.
이러한 관점은 현대물리학의 상대성이론에서 절대좌표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논리와 같다. 예를 들어 나란히 서 있던 두 차 중 어느 하나가 움직일 때 옆 차가 움직이는지 내 차가 움직이는지 모를 때가 있는데, 사실은 엄밀한 의미에서 절대좌표계가 없기 때문에 어느 것이 움직이고 어느 것이 정지해 있다고 말할 수는 없고 다만 두 물체는 상대적으로 움직인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이러한 사고방법은 모든 물체의 운동에 대하여 참고하고 비교하여 이것은 움직인다 저것은 정지해 있다고 말해 줄 절대좌표계가 우주 어디엔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고 싶은 인간의 집착에 커다란 변화를 강요하게 된다. 20세기 말에 이와 같은 상대성이론을 의심하는 물리학자는 거의 없다. 모든 자연현상에 대한 상대성의 인식 그리고 절대좌표계의 포기는 실로 인간사고의 혁신적인 진전이며, 고정불변의 실체를 부정하고 무상한 상대성 그 자체를 실상으로 받아들이는 불교의 연기론과 기본적으로 같은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 시간과 공간도 고정된 척도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의 시공간은 인간이 인간세계에서 따로따로 의미를 부여할 뿐 그 자체로는 절대적 의미를 가지지 않으며, 있다면 끊임없이 생멸하는 현상만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 연기론적 해석이다. 예를 들어 「현우경(賢愚經)」에서는 천상에서의 수명은 4천 년이라고 하며 도솔천의 하루는 지구의 4백 년에 해당된다고 한다.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두 계(系)에서의 시공간은 크기가 다르게 관측되며 절대좌표계가 없으므로 두 계에 있는 관측자들의 주장은 모두 옳다. 예를 들어 지구에 대해 상대적으로 상당히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계에 살고 있는 하루살이는 적어도 지구상의 시계로 관측할 때 몇 날 또는 몇 년을 살 수도 있다. 물론 상대방의 시계도 그만큼 느리게 갈 것이므로 그 계에서는 역시 하루살이겠지만, 이와같이 우주세계와 극미세계에서의 다양한 실험사실들로 입증된 시공간의 상대성 역시 불교의 연기론적 입장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넷째, 자유의지개념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연기론의 개괄적 설명에서도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불교의 인과응보사상은 불교가 인과론과 자유의지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금세기 이전의 과학자들이 믿어왔던 엄격한 인과론에 의하면 지나치게 개체들의 안과울에 집착한 나머지 오히려 자유의지마저도 부정되는 경향을 보여왔다. 즉 모든 물질현상이나 생명현상까지도 엄격한 역학적 과정의 산물일 뿐이지 그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우주의 모든 현상들은 이미 사전에 역학적으로 결정되어 있고 단지 그대로 진행되고 있을 뿐이라는 결정론이나, 또는 모든 우주의 운행이나 개체들의 행위까지도 인간능력 밖의 어떤 초월적인 힘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는 운명론은 너무 경직되어 있어서 인간의 성품이나 주변상황을 개선해보고자 하는 종교적 노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어왔다. 그러나 결정론이나 운명에 강한 의심과 불안을 품고 있던 인간들에게 자유의지가 들어설 자리를 만들어 준 것은 소위 불확정성원리이다. 이 원리에 의하면 개개의 입자들로 볼 때 원인없는 사건들이 있을 수 있으며-바로 여기에 자유의지가 끼어들 수 있다고 본다-그래서 엄격한 인과율보다는 많은 수의 입자들에 대해서만 확률적 인과율이 적용된다고 본다.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ꡐ자유ꡑ가 아니라 많은 것들과의 관계를 가장 편하고 자유롭게 하는 절제된 ꡐ의지ꡑ라는 점에서, 무상이란 실상 속에 연기적 자아의 확대를 꾀하는 불교의 자유의지 개념과 일치하고 있다. 또한 윤회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도 어떤 행위를 하면 무엇이 된다는 식의 결정론적 인과응보 해석은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전 우주가 한 생명체라는 연기론적 확신이 곧 깨달음이며 인간이 추구해야 할 공동선임을 자각함으로써, 인간행위에 대한 옳고 그름도 무아적 또는 전아적 입장에서 취해졌는지 아니면 아직 자각되지 않은 소아적 입장에서 취해졌는지 하는 기준밖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개체적 업보보다는 활률적 공업(共業)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이밖에도 불교에서 탐욕․집착․무지로부터의 해탈 즉 완전한 자유를 인간의 궁극적 목표로 보고 열반적정에 이른다는 점은 물리학에서 자연의 본질을 자유로 보아 모든 자연현상이나 생명현상은 인위적이고 구속된 상태로부터 무위적-무질서라고 말하지만-이고 자유스런 상태로 변화가 이루어져 결국 안정된 평형상태를 이룬다는 소위 엔트로피 증가법칙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소아적 행위는 두꺼운 업장에 의한 엔트로피 감소현상으로 볼 수 있고 업장을 녹여 해탈에 이르면 그곳이 바로 엔트로피가 극대화된 평행상태 즉 열반적정이요, 「아함경」에서 ꡐ집착할 것이 없으면 스스로 열반을 얻어 생(生)은 이미 다하고 범행(梵行)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스스로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ꡑ고 한 것도 그 경지를 표현한 것이다. 만일 역사의 발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모든 인간이 더 자유로워지고 인류문화가 더욱 다양해지는 것을 의미하며, 인간교육의 목적도 엔트로피의 극대화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불교의 연기론은 일원론적(一元論的) 사고방식으로서 이원론적 사고에서처럼 절대적, 대립적 개념에의 집착으로 투쟁적 해결을 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적․조화적 개념을 바탕으로 연기적 해소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은 현대심리학의 추세이기도 하고, 인간소외나 인종간․계층간 갈등 그리고 자연환경의 파괴 등과 같은 인간문제에 대환 지혜로운 극복방법이 될 것이며, 여러 종류의 분별적 힘들을 하나의 틀 속에 통합하여 물질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현대물리학 통일장이론과 같은 흐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대로 불교의 연기론적 세계관으로 볼 때 현대물리학의 개념들이 대체적으로 모순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불교가 이 우주의 모든 현상들을 파악하는데 과학적인 방법들을 탄력성 있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유일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과학발전에 의한 인간사고의 변화는 불교의 연기론적 사고체계가 더욱 의미있게 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이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