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경침의 유래와 우리의 관심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지혜의 샘 - 능인 김계유 / 한학자 2009년 01월 323호
사마광은 송나라 때의 재상이었다. 송나라 시대의 어진 여섯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면서 사마온공이
라는 시호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그는 평소 둥근 나무로 경침을 만들어 이를 베개로 대신해 사용하였다.
오계 시대의 전유도 마찬가지였다. 오계시대 10국의 하나인 오월吳越의 임금이었던 그는 군중에 있을 때 항
상 둥근 나무로 베개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자기의 긴장감을 다스렸는데 그 기물의 명칭이 경침이었다.
이 경침에 대한 해설은 예기禮記에 등장한다.
정현은 본문 내용의 요(茵)· 자리(席)·베개(枕)·의자(几)·경침( )·지팡이(杖)에 대해서 해석하면서 영
( )은 경침이라고 한다 하였다. 그 까닭은 은 깨닫는 뜻에 해당하므로 경침이라고 한다는 설명이다.
자나 깨나 성성한 정신으로 깨어 있고자 하는 노력 이것은 잠자리의 베개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음을 우리
는 주목해야 한다.
불교에서 한때 성철스님이 수행자의 공부 효과를 두고 오상일여寤寐一如와 삼칠三七간의 일여一如를 주장한
일이 있다. 이도 따지고 보면 베개의 명칭을 경침으로 일컫던 옛 사람의 한 유훈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수행을 하는 면에서 보면 살아 있는 정신의 활동이 특정한 시간이나 자리에만 매일 것은 아니라는 뜻일 수
도 있다. 좌선을 하고자 방석에 앉아 있을 때는 물론이지만 말하고 침묵하며 움직이고 잠을 잘 때조차 자기의
생각이 항상 본질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옛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내적인 허물을 집안의 가재를 훔쳐가는 도적보다도 더 무섭게 여겼다.
조선조의 어진 정승 허조에 관한 이야기다.
허조許稠는 자가 중통仲通 호는 경암敬菴 본관은 하양河陽이었다. 고려말 경오년에 벼슬길에 올라 조선조에
는 정승으로 좌의정에 올랐다.
허조는 기질이 간소하면서도 엄숙 방정하며 공평 청렴하였다. 거기에 그는 타고난 부지런함으로 매양 닭
이 울면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뒤 관대를 차리고 바로 앉아서 종일토록 게으른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
면서 행동은 항상 나라의 일을 깊이 생각하여 사사로운 일에는 관심을 나타내거나 말을 하지 않았으며 국정
을 의논할 때는 세가 유리한 남들의 생각보다는 자기의 신념을 지켜 남들에게 맞춰 부화뇌동하지 않았다는 평
을 받는다.
그는 한때 상하 관원의 복색을 책임지던 예조판서로 있을 때 공사에 임하는 처신이 지나칠 정도로 분명하였
으므로, 시정간의 경박한 이들은 그를 한없이 미워하여 수응재상瘦鷹宰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한편 그의 지나치게 엄격한 품행으로 인해 사람들은 말하기를,
“허공은 음양(부부 관계)의 일도 알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에 그는 웃으면서
“만일 내가 음양陰陽 일을 몰랐다면, 저 후詡와 눌訥이 어디에서 났단 말인가”하였다.(용재총화)
허조는 매양 부모의 기일을 당하면 반드시 그의 모부인이 손수 지은 어릴 때에 입던 푸른빛 작은 단령團領을
입고 눈물을 흘리며 제사를 지냈다. 또 그의 형 주周가 판한성부사로서 벼슬에서 물러났는데, 그는 항시 정부
에서 일을 보기 전 닭이 울면 반드시 형에게 가고, 갈 적에는 하인들을 동구에 떼어두고 수레에서 내려 형의 거
처까지 걸어서 들어갔다. 주도 역시 동생이 반드시 찾아올 것을 짐작하고 밤마다 의관을 바로 하고 등불을 켜
고 자리를 마련하고 몸을 안석에 의지해 기다렸다. 그래서 주는 동생이 오면 반드시 작은 술상을 차렸다.
허조가 조촐한 술상을 앞에 두게 되면 형에게 조용히 묻기를,
“오늘 정부에 이러이러한 일이 있게 되는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하면, 주는 대답하기를, “내 의견에는 마땅히 이러해야 될 것 같네”
하며 동생을 깨우쳐 주었다.
그러면 허조는 기뻐하며 물러나와 말하기를,
“옛말에‘사람은 어진 부형이 있음을 즐거워한다’하더니,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고 하였다.(청파극담)
그런 허조가 어느날 책상 앞에 단정하게 앉아 있을 때였다. 밤 사이 집에 도둑이 들어 집안의 물건을 모두 가
져가 버렸다. 그는 졸지도 않으면서 마치 진흙으로 만들어 놓은 허수아비처럼 앉아 있었다. 도둑이 간 지 오래
되어서 집안 사람이 비로소 이를 알고 쫓아갔으나 미치지 못하여 분통해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보다 더 심한 도둑이 마음 속에서 싸우고 있는데, 어느 여가에 바깥 도둑을 걱정하리오”하였다.(정암집)
돌이켜보면 이것은 새삼스러운 고사가 아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삶은 물질의 풍요로움이나 인간사의 어떤 기쁨보다도 더 무한한 깊이의 희열을 가져다주
기 때문이다.
분명 허조처럼 우리의 삶에서 물질보다 더 절실한 것이 우리 내면의 본질적인 가치가 아니라면 무엇이 이
땅의 희망이겠는가! 숱한 세월이 흘러도 후학들의 기억 속에 그 이름이 기억되는 그 옛적의 성현들과 구도자
역시 그들의 생애를 그 가치를 위해 보냈기에 우리는 그들을 무한한 긍지로 여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가장 우리답게 만들고자 하면 허조의 행적을 기억해야 한다.
반면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면서도 그 진리가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자기 자신이 진리를 쫓고 있는데 그 노력으로 인해 자기 자신에게 불편함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를 잘못 쫒
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경침에서도 그것을 분명하게 느껴야 한다. 몸은 고달파도 그 고달픔을 이기게 하는 기쁨이 경침에
있었기에 그들은 잠을 자면서도 경침을 가까이할 수 있지 않았을까! 본인은 그렇다고 믿는다.
을 깨닫는 뜻이라고 풀이하여 경침이라고 했을 때 아마 정현의 의도도 사실은 초점이 여기에 맞추어져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