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도 어릴 적 절에 들어와 일찍이 지어놓은 복이 있어 오늘날 해인사 자락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산다고 생각하
니 돌아보면 지난 고생이 오히려 감사하다. 그러나 부처님이 누구인지 스님은 무엇을 하며 사는 사람인지 채 알기
도 전에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나의 삶이 결정됐으니 커가면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고 한동안 정신적
인 방황도 거쳐야만 했다.
내가 절에 들어 온 것은 아홉 살, 타고난 짧은 명
줄을 잇기 위해서였다.
아마 그때가 8살이 되던 해였듯 싶다. 사월 초
파일. 어머니가 다니시던 절에 등공양을 하러 갔었
다. 무슨 말 끝에 나온 얘기인지는 몰라도 아직까
지 기억하는 것은 그 스님의 말씀 한마디였다.
“ 얘는 명이 짧아 절 집에 보내는게 낫겠다 ....”
어린 마음에 내가 일찍 죽는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참으로 공포스런 일이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여동생
은 한 노스님이 사는 절로 옮겨지게 되었고 또 얼마
후 한 비구니 스님의 손에 이끌려 홀홀 단신 이 곳
해인사 금선암으로 들어왔다. 당시 나를 보내던 스
님은 분명 삼선암에 데려다 주라고 했던 것 같은데
어찌된 일인지 그 비구니 스님은 나를 금선암에 내
려놓고 돌아가셨다. 훗날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비
구니 스님이 삼선암과 개인적인 불편함이 있어 그
곳에 가질 않고 이웃한 이 곳 금선암에 나를 내려
놓게 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여동생과도 헤어졌으
니 그것이 세간 인연의 마지막이 되었다.
살기 위해 들어 선 절 집. 늦가을이었던 듯 싶다.
절마당으로 들어서니 낙엽이 가득했고 어린 마음
이지만 부는 바람따라 나뒹구는 낙엽들을 보며 서
럽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마도 후에 겪게 될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뭔지 모를 불안감을 알고 있었
던 듯 싶다.
그 날 이후 나는 주는 밥도 먹지 않고 말도 않은
채 한 보름정도를 내 멋대로 행동하며 밖으로만 돌
았다. 여기는 내가 살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였
다. 어찌나 고집이 세었던지 어느 날 밤 노스님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저 고집 때문에 중 되기 글
렀으니 나를 다시 보내라고 하셨다. 그러자 노스님
을 시봉들던 내 은사 스님은 저런 아이가 커서 나
중에 제 몫을 한다시며 그냥 데리고 있자고 청하시
는 얘기를 잠결에 듣게 되었다. 아무리 고집을 부
려도 집에 돌아가기는 틀린 듯 싶었다.
그렇게 힘든 마음으로 며칠을 더 보내던 차에 노
스님 속가 어머님의 제삿날이 되었다. 나는 그날
무슨 마음에서였는지 절 안에 있으면서 이것저것
일 손을 도우며 심부름을 하였다. 음식냄새 가득
한 공양간을 드나들며 그릇을 나르고 전을 집어먹
고 하는 동안 뭔지 모를 안도감이 찾아들었다. 어
머니 곁을 떠나 이 절 저 절 옮겨지는 것에 대한 불
안감도 사라지고 비로소 처음으로 절 집에 마음을
붙이기 시작했다. 나의 본격적인 행자 생활이 시
작된 것이다.
해인사에 전기가 들어 온 것은 내 속가 나이 스
무살이 다 되어서이니 그 훨씬 전, 아홉 살 출가 당
시인 60년대 산중 살림은 촛불도 귀했던 시절이다.
모든 것이 사람들의 힘으로 만들어져 생계가 유지
되니 금선암 역시 마찬가지였다.
금선암에는 주원珠圓 노스님과 그 밑으로 내 은
사 스님이신 병수 스님을 비롯해서 3대로 내려오는
일곱 스님이 함께 살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공부를
이유로 잠시 잠깐 머물다 또 다시 운수행을 하고 돌
아오는 분들이다보니 정해진 일손은 연세가 육십
을 넘긴 노스님과 마흔을 넘긴 은사스님, 어린 나
와 내 밑으로 들어 온 마흔 줄의 사제 한 명, 달랑
네 사람 뿐이었다. 기도와 예불로 꽉 짜여진 절집
생활에서 생계를 위한 운력까지를 모두 해내려면
바쁜 일 손 탓에 하루 해가 늘 모자랐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게 내 삶을 오늘로 이끈 공
부였고 감사한 시간이었지만 당시 어린마음으로는
새벽 3시 눈을 뜨는 시간은 단잠의 행복마저도 빼
앗기는 절망의 시간이었고 이후 기다리는 일과가
어찌나 숨가쁜지 언제 이 절을 떠나는가 오직 떠날
날만을 기다리곤 했었다.
새벽 예불을 마치면 곧바로 5시 반까지 참선. 밥
준비를 하고 아침 공양을 마치면 다시 염불암송.
그렇게 아침 해를 맞으면 이번에는 물을 긷고 나무
를 하고 도량 청소를 하고 다시 사시 예불을 드리러
법당에 앉는다. 이어지는 점심공양도 느긋함이 없
다. 조금이라도 굼뜨다 싶으면 어느새 호랑이 노스
님의 추상같은 불호령이 떨어진다. 다시 호미들고
밭으로 나가 양식 농사를 짓고 허리를 펴면 어느새
벌건 저녁 해가 눈에 들어온다. 시인들이 말하는
핏빛 서러움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까. 저녁
예불 후에는 다시 목탁을 들고 정근하며 늦은 밤을
다시 보내니 어린 것이 목숨 하나 잇겠다고 절에 들
어와 사는 입장에서는 쉽게 떠날 수도 없는 마음,
모든게 서러웠고 그런만큼 세상살이 원망심이 어
린 나의 정서를 지배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나의 이런 마음에 그나마 위로가 된 것은 바로
호랑이 노스님이었다. 해인사 비구 스님들 조차 무
섭다고 뒷걸음질 치던 나의 노스님은 모든 것에 당
당하고 경우가 밝으시면서도 화통하고 마음 씀이
늘 넉넉하셨다.
하루는 예수재때 쓰려고 만들어 놓은 전을 밤사
이 몽땅 도둑맞는 일이 생겼다. 하루종일 장만한
음식이기도 했고 없는 살림에 정성껏 준비한 공양
물들이다보니 그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없었다.
비구스님들 사는 절보다 비구니 스님들 사는 암자
의 음식이 더 맛있고 풍성한 것을 아는 강원의 개구
장이 학인스님들이 몰래 찾아들어 야식거리로 가
져가버린 것이다. 이는 해인사 경내에서 종종 일어
나는 일로 당시 해인 강원 스님들에게는 전통처럼
내려오는 행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한 입장에서
는 화가 나고 오늘 당장 부처님 전에 올려야만 되
는 음식이니 이만저만 낭패가 아니었다. 모두가 한
걱정을 하며 난리가 난 상황 앞에 노스님은 별 일
아닌 듯 느긋하셨다.
어차피 부처님께 올릴 공양인데 어느 부처님이
드시든 무슨 상관이냐며 대수롭지 않게 상황을 넘
기셨다.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만이 부처가 아니라 사람
이 곧 부처라는 가르침을 주신 계기가 되었다. 이
일로 나는 공부하는 수행자의 모습에 조금씩 관심
이 생겨났고 말없는 실천으로 가르침을 주시는 노
스님의 삶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스님으로서의 마
음가짐과 자부심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한참 예민한 사춘기, 노스님의 면면을 닮아가고자
노력하는 마음도 만들었으니 힘든 행자시절을 버
틸 수있었던 또 하나 이유가 되었다.
나의 따르는 마음을 아셨던지 노스님도 얼마쯤
지나고부터는 나에게 이렇다할 호통은 치지 않으
셨다. 오히려 타고난 부지런함과 영민함이 있다며
내가 하는 일에 대해 격려와 신뢰를 주셨으니 뿌
듯함과 칭찬받는 재미로 어느덧 가득찼던 원망심
은 사라지고 나도 모르는 사이 수행자로서 살아내
는 많은 것들이 내 몸과 마음에 습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더구나 금선암의 칼국수가 일품이라는 소문과
함께 해인사 많은 큰스님들이 찾아주시며 이런 저
런 올곧고 아름다운 면면을 보여주시니 그 또한 행
자시절 나의 산 공부가 되었다.
그렇게 스무살, 강원에 가기 전까지 11년을 보냈
던 금선암 행자시절. 누구보다 길고 마음 힘든 시
간이었지만 돌아보면 일하면서 굵어진 어린 잔뼈
는 왠만한 큰 일 앞에서도 두려움없이 살아내는 생
활의 근기를 만들었고 나의 단잠을 뺏아갔던 부처
님 말씀과 염불 공부는 나의 정신을 살찌워 오늘
올곧게 공부하는 마음을 만들어내니 모두가 감사
할 뿐이다.
어느덧 법납 40여년이 지났다. 타고난 나의 목숨
은 이쯤에서 그 명 땜을 다 한 듯싶다. 이제부터는
여분의 삶으로 그간 부처님 전에서 지은 복이 있어
주어진 행복이라 생각한다. 요즘은 다시 태어난 듯
한 홀가분함이 있고 공부는 이제부터라는 생각에
법당을 들어서는 마음이 무척이나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