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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패로 문화포교 시대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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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상훈스님 2009년 01월 323호
진감국사 신라 문성왕 2년, 당나라에 가서 선종의 법法을 잇고 돌아온 진감국사眞鑑國師 혜소스님(慧昭, 774∼850)이
차茶의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 자락에 심고 대가람을 중창하여 수행의 방편으로 팔영루에서 범패를 전수하
니 그 목소리가 아름다워 당시 쌍계사에는 범패를 배우고자 몰려드는 이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
다. 그 후 지리산 아래 섬진강 줄기를 따라 많은 범패 명인들이 배출되니 일부는 오늘로 이어지는 불교음악
으로 또 일부는 민중음악과 결합하여 동편재 서편재로 나뉘는 우리나라 전통적인 소리문화의 원형을 이루
었다. 이렇듯 범패를 통해 중생제도라는 불법 대중화를 실천했던 진감선사의 깊은 뜻을 오늘에 되살려 문화
포교의 원을 세우고 범패전수관 건립을 추진 중인 쌍계사 주지 상훈스님(尙勳. 법납 33년)을 만나본다.
열린 마음이 곧 수행심이요 종교라고 말하는 상훈스님.
마음을 여는데는 음악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스님 역
시도 불교음악에 매료되어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으니 상훈
스님에게 범패는 곧 부처요 수행의 방편인 셈이다.
음악을 전공하신 아버님 덕분에 어릴 적부터 바이얼린도 배우
고 음악적 재능도 물려받았습니다. 또 스승, 고산스님도 범패의
일인자로 바깥소리 중 홑소리와 안채비 소리에서는 따라 올 사람
이 없을 정도의 목소리를 가지신 분입니다.
세간의 인연이나 출세간의 인연이나 모두 음악적 환경을
만들어주니 필경 범패에 대한 남다른 열정은 우연이 아닐
듯싶다. 더구나 국악 대중화에 한 획을 그은 창작국악 작곡
가 박범훈 선생과의 인연으로 불교음악에 대해 보다 전문적
인 식견까지 고루 갖추게되니 이제 상훈스님에게 있어 범패
는 듣기 좋은 염불소리나 예불할 때나 하는 의식이 아닌 우
리나라 전통음악으로서 반드시 지켜내야만 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인식되고 있다.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80%는 바로 불교 문화유산입니다. 따라서 전통문화를 잘 지켜가는 것이 곧 불교를 잘
지키는 일입니다. 심청전만해도 소리는 염불소리의 변형인 판소리요 내용 또한 불교적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심봉사의 눈을 뜨게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석을 바치라는 것은 보시공덕으로 업장 소멸의 기회를 가지라는 것이
요 아비를 위해 팔려가 인당수에 몸을 던진 것은 바로 지장보살님의 현신이 심청이라는 뜻입니다. 더구나 연꽃
으로 환생하여 왕비가 되고 효심으로 잔치를 벌여 아비는 물론 모든 장님들까지 눈을 뜨게한 것은 더없는 중생
제도입니다. 자비와 보살행으로 완벽한 불국토 이상세계를 이룩한 것이지요.
스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 생각을 쫓아가다보니 우리나라 전통문화는 그 뜻이나 형식에 있어
불교 아닌게 없는 듯하다. 또한 부처님 법을 장단과 소리에 담아 이야기로 전달하니 열린 마음 자연
스럽게 마음 법문으로 다가 서게 된다. 함께 즐기며 편하게 전해지는 부처님 법문, 이것이 바로 민중
불교요 진정한 포교라는 상훈 스님.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나라 전통 문화예술의 아름다움을 알려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는 것이 불교
를 널리 알리는 일이요, 곧 중생제도라고 말씀하신다.
가·무·악으로 이뤄진 범패는 종합 예술입니다. 예술은 사람들의 지친 마음, 닫힌 마음을 위로하고 활짝 열
리게 함으로서 서로를 상생하게 하고 소통하게 합니다. 법을 전하고 받는 것 또한 이런 즐거움과 자유로움이 있
을 때 비로서 부처님 법이 마음 속 깊이 새겨집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염불원이라하여 큰 절에서는 불교 의식의 하나로 범패를 가르쳤습니다. 쌍계사의 팔영루도 염불원의 형태로 운영
되어왔던 것인데 이제 그 명맥이 끊겨버렸습니다.
그 옛날 쌍계사의 중창조인 진감국사가 팔영루에서 수행과 포
교의 방편으로 범패를 가르치며 법을 전하셨듯 상훈스님도 다시
그 맥을 이어 범패로 불법을 전하는 문화 포교의 원을 세우셨다.
오는 2010년 완공 예정인 범패전수관은 차, 선, 음악을 가르치
는 불교의 종합문화 예술관으로 진감-초의선사로 이어지는 다맥
전수 대법회와 산사음악회를 여법하게 이끌어 나갈 방침이다. 이
는 한국 전통차의 시배지이자 전통불교음악인 범패의 발상지이자
육조 남종선의 진원지인 쌍계사의 위상을 다시 세우는 것으로 이
는 상훈 스님 자신을 이끌어주신 스승과 법으로 삶을 이끌어주신
부처님에 대한 보은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돌아보면 내가 우리 스님 속을 많이 태워드렸습니다. 염불을 가르쳐
놨더니 법당에 앉아 얌전히 기도할 생각을 않고 국악인들과 어울려 다
니며 예술을 한다고 무대에 서고 또 소리하는 사람들을 절 마당으로 끌
어들여 산사음악회를 한다고 온통 시끄러운 난장판을 만들었으니 걱정
이 되신게지요. 저러다가 딴따라가 되는 것이 아닌지..또 중이 장가 간
다고 하는 것은 아닌지...제대로 된 중노릇 못할까봐 온통 걱정이셨습니
다. 그런저런 일들로 지난 세월 참회하면서 스님께 드린 각서만도 수십
장은 될 겁니다. (허허..).
그도 그럴것이 현재 쌍계사 조실로 계시는 스승 오고산 스님은
경율론 삼장에 밝은 대율사로 지난해 10월 조계종 단일계단의 전
계대화상으로 위촉돼 종단 최고의 계사로 존경을 받고 계신 분이
다. 이렇듯 자타가 공인하는 여법하고 지엄한 스승이기에 제자의
거침없고 자유로운 기질은 늘 걱정이 되셨다. 그러나 포교에 대해
서는 누구보다 자각이 크신 분으로 일찍이 도심 포교당을 설립하
고 전국의 일선 포교현장에 두루 참여해 법문하시는 등 실천 불교
에 앞장서오신 분이기에 포교를 위한 범패문화복원 운동에는 아
낌없는 후원을 해주셨다.
예나 지금이나 스승의 사랑은 제게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출가하여 얼
마 되지않아 스님이 안 계신 동안 재무를 보던 스님과 큰 다툼이 있었지
요. 위 아래 가리기로는 절집 법도만큼 엄한게 없는데 어린 사
미가 선배 스님께 대들었으니 큰 일이 난겁니다. 겁이 난 마
음에 절 밖으로 도망을 나왔지요. 꼬박 굶어가며 며칠을 돌아
다니다 스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스님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 집에 아무도 없다. 어서 들어와라’하시더라구요 어찌
나 따뜻하고 감사하던지 그만 울어버렸습니다
그 일로 스님은 해인 강원에 입학을 하게 됐다. 절 집
위계 질서가 시끄러우니 갈등을 피할 겸 공부를 하고
오라는게 스승의 말씀이셨다.
경책 대신 공부를 하라셨습니다. 또 중간에 공부를 포기하
면 인연을 끊자는 이은 각서까지 쓰라시더라구요. 워낙 큰 죄
를 지었으니 꼬박 시키는대로하고 해인사 승가대학에 입학을 했
지요. 그러나 워낙 괄괄하고 솔직한 성격 탓에 순탄치 않아 몇 번
의 고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은사 스님에게 쓴 각서가 있어서 마
음을 잡고 무사히 강원을 마쳤습니다. 돌아보면 다 저를 키우느라 내
린 사랑의 방편들입니다.
방학때 스승 곁으로 가면 당신 덮던 담요까지 모두 싸주시며 공부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던 스승 덕에 상훈 스님은 사회적으로 갖출 수있는 모든 공부를 마치고 다시 쌍
계사로 돌아올 수있었다. 그리고 총무 재무 교무 삼직에 이어 원주까지 종무 행정에 필요한 7직 소
임과 종단 소임까지 두루 거치면서 절집 살림을 살아내기 위한 전문적인 식견까지 두루 갖추게 되었
다. 모두가 스승의 한결같은 사랑 덕분으로 감사한 마음을 범패 부흥에 담아 스승의 은혜에 보답코
자한다.
전통문화를 통한 포교는 21세기 다문화시대를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국적 없는 문화현상들
이 난립하는 요즘 국악 등 민족문화 예술이 불교문화 예술과 같은 뿌리임을 인식한다면 서양문화가 아무리 밀
물처럼 들어온다해도 그 정체성만은 지켜진다고 봅니다. 바로 불교를 지켜가는 일입니다. 불교가 우리 민족과
사반세기를 같이 한 만큼 우리 민족의 정체성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게 불교적 세계관입니다. 불교
문화야 말로 가장 한국적인 그리고 오래된 전통문화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통을 지켜나갈 때 비로소 불교
문화도 지켜질 수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