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희랑스님은 신라 진성
여왕 3년 을유乙酉(889)에 거창군 성기聖基에서
출생하였으며, 속성俗姓은 주씨朱氏이고, 15세에
해인사로 출가하였다고 한다. 스님이 태어난 시
기는 신라의 하대下代(780~935)에 속하며, 이 시
대는 궁예와 견훤을 비롯하여 수없이 일어난 반
란으로 신라는 정치적·군사적 통제를 잃고 국가
적인 혼돈과 무너짐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또
한 스님이 출가한 해인사는 창건주인 순응順應스
님과 이정利貞스님의 뒤를 이은 결언決言스님과
현준賢俊스님의 활약으로 신라말新羅末 화엄종華
嚴宗의 중심도량中心道場으로 면모를 굳건히 하
였다. 결언決言스님과 현준賢俊스님은 화엄경결
사華嚴經結社와 종남산엄화상보은사회終南山儼和
尙報恩社會 등을 조직하고 주도하면서 왕실과 밀
접하고 돈독한 관계를 맺고 유지하게 된다. 이처
럼 최치원의 친형인 현준賢俊 대덕大德이 해인사
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의 해인사가 중요
한 위치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현준이 당
시의 왕권과 깊이 맺어져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
이다.
15세에 해인사로 출가한 희랑스님은 누구보
다 현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후삼국後
三國의 격동의 시기에 화엄종단華嚴宗團을 이끌
어 갈 수 있는 기반은 현준 대덕에 의해 형성되
었고, 그러한 기반이 이루어진 데에는 당시의 왕
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현준스님의 영
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신라말新
羅末(930년 경)에 승통僧統 희랑希朗 대덕大德이
해인사에서 고려의 태조太祖인 왕건을 도와서 전
승戰勝하게 한 공功으로 왕건의 복전福田이 되고
나아가 고려의 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태조
의 희사喜捨로 해인사를 크게 중창하는 데에 이
르게 된다.
지리적으로 해인사는 후백제에서 신라에 이르
는 중간지역에 위치하고 있어서 군사적 전략의
요충지대에 놓여 있었고, 해인사와 멀지 않은 팔
공산八公山에서 견훤과의 일대전투를 벌인 왕건
은 휘하의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 등 많은 장수
들을 잃고 패배하였으며 자신도 겨우 사지死地에
서 탈출하는 곤욕을 치르게 된다. 목숨이 위급한
것은 물론 자신의 오른팔과도 같았던 심복인 신
숭겸과 장수들을 잃은 정신적인 허탈감을 떨칠
수 없었던 왕건은 희랑스님에게 귀의하여 용기
와 각오를 돈독하게 다지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
로 희랑스님은 왕건의 존사尊師로서 고려 건국을
돕게 되었고, 국가적인 신임과 후원을 받아 해인
사를 크게 중창하기에 이른다. 희랑스님과의 인
연으로 불교에 귀의한 태조 왕건은 광종光宗에게
내린 훈요십조訓要十條의 첫머리에‘우리나라의
대업은 반드시 모든 부처님의 보호와 지켜 주심
에 힘입은 것이다(일일아국가대업一曰我國家大業
필자제불호위지력必資諸佛護衛之力)’라고 천명
하면서 불교에 대한 귀의歸依와 신봉信奉을 후대
에 부촉하였다.
희랑스님이 입적入寂한 후에 광종은‘해인존
사海印尊師 원융무애圓融無碍 부동상적不動常寂
연기상유緣起相由 조양시조照揚始祖 대지존자大
智尊者’라는 익호諡號를 내렸는데, 여기에는 해
인사로 출가하여 거주하면서 신라말新羅末에는
승통僧統으로 주지住持하였으며, 고려초高麗初에
는 왕王의 존사尊師로서 건국建國에 일조一助하였
고, 화엄華嚴과 선禪을 원만圓滿하게 포융包融하
면서도 화엄종華嚴宗의 중심中心 인물로 화엄종
찰華嚴宗刹인 해인사를 중창하였고, 고려시대에
불교가 국가적인 숭상崇尙과 후원을 받아 제세濟
世의 역할을 다하도록 하여 화엄의 사상思想을 빛
낸 조사祖師라는 희랑스님의 업적을 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처럼 화엄종의 대종장大宗匠이며, 해인사 중
창의 대공덕주大功德主이자 고려 태조의 복전福
田으로서 명성名聲을 높인 희랑스님께서는 나
반존자를 본사本師로 수행하였다. 추측컨대, 현
재 희랑대 독성전 옆의 바위에서 좌선삼매坐禪
三昧에 드셨던 희랑스님께서는 희랑대 주변의 산
세山勢와 삼면三面을 외호外護하고 있는 바위를
관망觀望하시면서 나반존자가 소나무와 바위 사
이로 자취를 숨긴[송엄은적松巖隱跡] 지형과 흡사
하다는 것을 알게 되셨고, 이를 계기로 좌선하던
바위 옆에 소나무를 심고 나반존자를 모신 희랑
대를 창건하셨다. 희랑대 독성전 옆에는 희랑스
님께서 좌선하시던 안장바위(엉덩이바위)와 정면
으로 마주 보고 있는 노적봉, 그리고 동쪽의 백
련암 방향의 바위 등의 세 바위가 중심축을 이루
는 지형으로 이것은 지장전의 호랑이가 앉아 있
는 형세와 요사채 위에 제비가 집을 지어 알을 품
고 있는 산세와 함께 송엄은적경천겁松巖隱跡經
千劫(소나무와 바위 사이로 자취를 숨겨서 천겁
을 지내는)하는 나반존자의 게송偈頌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희랑대를 둘러싼 산세와 형상
이 희랑대에 나반존자를 모시게 된 결정적인 요
건인 것이며, 따라서 희랑대 자체가 나반존자가
자신의 자취를 숨긴 도량과 다르지 않다고 할 것
이다.
또한 희랑대덕希朗大德은 아미타불을 본사本
師로 삼고서 세세생생 아미타불을 정대頂戴하여
모신 관음보살을 본받아 의상스님께서 관음보살
을 본사로 삼고 세세생생 정대하여 모시기를 발
원한 것을 다시 본받아서, 나반존자의 도량인 희
랑대에 나반존자를 모신 것을 계기로 희랑스님
역시 나반존자의 수행을 수순隨順하고 흠모하면
서 세세생생 본사로 모실 것을 발원한 것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역대의 모든 조사스님들께서 비
문과 영정 등의 자취를 남기신 반면 희랑스님은
스스로 비문과 영정 등의 자취를 허락하지 않으
셨는데, 이것이 바로 자취를 숨긴 나반존자의 수
행을 본받으려는 희랑스님의 의지와 다르지 않다
고 할 것이다. 그러나 비문이나 영정을 만류하신
희랑스님의 유지를 어기지 않으면서도 흠모의 마
음과 애끓는 그리움을 풀어내지 못한 후학後學들
은 희랑스님께서는 생각하지 못한 조각상을 조
성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탱화의 진영으로
그 모습을 남기고 있는 다른 조사스님들과 달리
오직 희랑스님만이 유일하게 목조조상木造彫像의
진영을 남기게 된 것으로, 참으로 다행하고 소중
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일설一說에는 이 상像을
희랑조사가 직접 조성했다는 전설이 있지만 이
것은 거의 믿을 수 없는 것이며, 다만 이 상은 바
로 돌아가시기 직전의 모습을 옮긴 것으로 스님
의 제자들이 스승을 흠모하는 애절한 염원을 담
아 조성한 것으로 보여진다.
다시 생각하면 희랑스님은 말세末世의 중생들
을 위해서 스스로가 나반존자로 환생하려는 의지
를 펼치고, 그 자취를 희랑대에 남기신 것이 아
닌가 싶다. 나반존자께서 자취를 숨기신 지형에
부합하는 장소에 기도처를 창건하고 스스로 나
반존자로 환생하여 말세 중생들의 기도와 소원
과 정성에 감응하시려는 스님의 교화敎化의 위
력偉力이 도량 곳곳에 넘쳐나는 희랑대에서 간
절하고 절실한 소망을 풀어낸다면, 나반존자님
과 희랑스님의 구세원력救世願力을 바탕으로 이
루어내지 못하거나 성취하지 못할 기도나 정성
은 전무全無하리라는 확고한 신념信念으로 새해
를 시작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