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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사회와 종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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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이형용 2009년 01월 323호
한 해가 저물고 또 한 해가 동트고 있습니다. 2009년이 열리고 있습니다. 온 지구촌이 일면 경외감
속에 시작했던 새천년의 첫 백년, 21세기도 첫 십년의 마지막을 맞고 있습니다.
새 천년 혹은 새 세기를 맞으며 많은 지성들이 많은 사회운동가들이 지난 백 년 혹은 천 년을 돌아보
며 진지하게 미래사회를 열어갈 새로운 비전, 새로운 패러다임,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을 머리로 가슴
으로 또 몸으로 모색하고 있습니다. 자주 등장하는 담론들만도 여러 묶음들입니다.‘합리주의적’,‘이
원론적’,‘인간중심적’,‘물질주의적’세계관을 대체하는‘탈합리주의적’,‘전일적’,‘생태론적’,‘탈
물질주의적’ 세계관이라고도 합니다.‘투쟁적’‘, 갈등적’‘, 구심적’‘, 남성적’사유를 극복하는‘상생
적’,‘조화적’,‘원심적’,‘여성적’사유들이 강조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제‘종교성’‘, 종교성의 지평’에서 대안의 사회, 대안의 주체, 대안의 운동을 모색하는 것을 제
안합니다. 새 천년의 미래사회를 여는 사회운동으로서‘종교성 운동’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그 궁극지향은
한마디로‘존재의 자유와 열린 연대’, 그리고 참다운‘휴머니즘이 꽃피는 미래사회’의 추구입니다.
19세기, 20세기는 위대한 사회변혁운동의 시기로 기록됩니다. 그러나 사회변혁도 역시 존재의 변혁
을 북돋는 데서 비로소 제 본래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종교성 운동은 직접 존재의 변혁에 닿는 운동
입니다. 존재의 변혁은 물론‘존재의 자유’를 쫓고,‘자유하는 존재’에 육박하는 것입니다.
존재의 자유는 생존의 위협, 공포로부터의 자유 같은 소극적 자유를 넘어섭니다. 정치경제적 자유,
사회적 자유를 넘어 그를 포괄하고 넘어서서 보다 심층적이고 근원적인 인간 존재, 인간의 내면 풍경
에까지 직접 육박해가는 적극적이고 그런 의미에서 더욱 치열한 자유를 이릅니다.
그같은 존재의 자유는 우선 온갖 형태의 금기와 내면의 억압을 넘어서는 지점을 향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알기로 원시시대 이래로 인류사에 제사장이 등장하고 최초의 부드러운 권력을 휘두
를 때 그는 천지신명의 대리인이었고 그가 전하는 천지신명의 명령과 가르침의 권위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었고 그리하여 그것은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금기로 서서히 자리 잡아갔습니다. 그처럼 오랜 외적
사회적 혹은 심지어는 물리적 강제의 경험, 기억들이 내면화하면 스스로의 가능성과 자아실현 욕구의
범위 혹은 그 실현 방식을 한정짓거나 왜곡하게 됩니다.
인격의 성숙 또는 수련의 연마를 위해 외적 억압이나 보이지 않는 공포없이 자율적으로 설정하고
변경하는 금도가 절제의 문제라면, 금기는 억압의 기제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의 내면
으로부터 억압하는 것으로 작동하여 자신의 존재를 일정한 꼴로 규정하고 제한하고 테두리에 가두는 것입니다. 금기를 해체하는 것은 곧 존재의 변혁이고 자유의 확대에 이르는 길입니다.
존재의 자유는 또한 분별과 경계를 넘어 무애한 경지를 향하는 것입니다. 유사 이래로 우리들은 생
존을 위하여 끊임없이 판단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우호적인 개체나 집단을 찾아 한 패
가 되어, 비우호적인 나아가 적대적인 힘이나 집단을 경계해야 합니다. 때로는 그들을 공격하고 정복
해야만 합니다. 이와 같은 역사와 경험이 반복되면서 어느덧 다양한 측면, 다양한 차원에서 편의적이
고 유동적이었던 분별은 그 자체 객관적인 실체로 자리잡아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끊임없이 선악
과 시비, 의와 불의, 아와 타의 구분과 그 중 한편으로의 귀속을 강요받으며 어느덧 타방과의 경계는
위협과 감시의 지점이 되고 나아가 넘을 수 없는 벽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존재는 늘 분
별에 사로잡히고 넘을 수 없는 나, 우리의 벽 안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분별을 분명히 하되 그에 그만 사로잡혀 스스로를 고착시키지 않고, 경계 위를 걸으며 경계를 넘나
들 수 있을 때 존재의 자유는 확장됩니다. 특별히 경계에 들되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 것은 주위와의
관계, 타자와의 관계에서, 그것도 살아 펄떡이는 관계에서 자유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우리 사회 일부에 팽배한, 이를테면 막행막식을 무방반야라고 하는 따위 섣부른 선풍禪風의 곡해와는
전혀 달리, 근본에 육박하는 끈질긴 사유와 칼날 위를 걸어가는 균형 안에 뚜렷이 있습니다.‘사유와
균형’은 분별과 경계를 넘어 자유에 이르는 길입니다.
존재의 자유는 마침내 실존의 한계 너머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자의식을 가진 우리 눈 앞에 다가드
는 우리 자신의 존재는 실존입니다. 실존의 한계는 피할 수 없는, 외면하려도 외면할 수 없는, 우리 존
재의 근원적 한계이며 그 한계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 무엇보다 강한 제약입니다. 이를테면 죽음이
나 단독자로서의 존재 양상 등은 일견 피할 수 없는 제약입니다. 그에 대한 자각은 마침내 근원적 허
무, 허무의 심연을 보게 하고, 그것은 우리 존재의, 우리 생의 의미의 근거를 허물어뜨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칫 오히려 존재의 방종에 이르게 하는 병이 됩니다.
이 허무의 심연을 넘어서는 것이야말로 존재의 궁극적인 자유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것은 곧 실존
의 한계를 넘어 초월을 향하는 것이고, 이는 은유적으로 말해서 지상의 허무를 넘어 영원의 충일로 가
득차는 것입니다.
존재의 자유를 좇는 존재의 변혁은 종교성의 지평위에서, 종교성의 고양을 통해 보다 힘있게 혹은
보다 자연스럽게 잘 추동될 수 있습니다.
존재의 자유를 좇는 길은 곧 자아정체성의 확립과 확장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즉,‘참 나’를 찾
고 참‘나의 삶’을 사는 것이고, 또한 나를‘관계’ 속의 나로 바로보고,‘지고와 보편’으로 향하여
확장하는 것입니다.‘참 나’를 사는 길은 통속화한 이미지에서처럼 반듯하고 우아하게 산다는 것이
기보다는 이 우주에 불이무비不二無比하게 유일한 자신의 고유한 생의 의미를 추구하는 과정 그 자체
입니다. 또한 나의 결핍과 고립을 넘어 지고와 보편으로 확장하는 것은 곧 실존의 한계 너머 궁극에
대한 인식, 그에 대한 관심의 환기에 의해서 잘 인도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종교성 운동을 두고‘존
재의 변혁에 닿는 운동’, 존재의 변혁에 이르는 운동이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