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에 석남사라는
비구니사찰이 있고, 이 절의 뒤편에 도의국
사의 사리탑으로 전하는 승탑이 자리하고 있
다. 이러한 전승이 사실이라면, 도의스님의
승탑은 진전사지에 있는 것과 함께 2기가 있
는 셈이다. 그런데 석남사 부도는 도의스님
의 승탑이 아니다. 석남사가 위치한 곳이 가
지산이기 때문에, 가지산문의 개산조인 도의
스님과 관련시킨 듯하다.
달에 깃든 뜻
고궁박물관의 소재구 관장이 고증한 것처
럼, 석남사의 부도는 낭공대사郎空大師 백월
서운탑白月棲雲塔이다. 낭공대사란 행적行
寂이라는 스님에게 올린 시호諡號이고, 백월
서운은 그의 승탑에 올린 이름이다.
백월에는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
는 한 달의 전반 15일이라는 뜻으로 인도에
서 쓰였다. 그래서 후반 15일을 뜻하는 흑
월黑月과 짝을 이루는 말이다. 또 하나는 보
다 일반적인 뜻으로 희게 빛나는 달이다. 그
래서 원만함의 상징으로 쓰이곤 하였다.
이 두 가지 뜻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한
달 중에 전반부 15일 동안 달은 자꾸 커져
서 보름달이 된다. 백월이라는 기간 동안 달
을 자꾸만 둥글게 커져 보름달인 백월이 되
는 것이다. 그래서 보름달을 뜻하는 백월은
지혜나 수행의 완성을 비유하는 데 쓰인다
면, 한 달의 전반부를 뜻하는 백월은 완성
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비유하는 데 쓰인
다. 불경에서 달이 어떤 비유로 쓰이고 있는
지를 보자.
말하자면 청량한 달이 능히 뜨거운 번뇌를 없
앨 수 있는 것처럼, 대단히 깊은 반야바라밀다 또
한 이와 같아서, 능히 일체의 번뇌와 열독을 능히
없앨 수 있다. 또한 밝은 달을 세상 사람들이 즐겨
보는 것처럼, 대단히 깊은 반야바라밀다 또한 이
와 같아서, 일체의 성현들이 즐겨보는 바이다. 또
한 백월이 날마다 커지는 것처럼, 모든 보살중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여, 초발심으로부터 추
구하는 바 무상정등無上正等의 보리가 점점 커지
는 것을 증득하기에 이른다. 또한 흑월黑月이 날
마다 줄어들어 없어지는 것처럼, 모든 보살중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여, 모든 번뇌가 점점
줄어들어 없어진다.( 「대반야바라밀다경」)
謂如涼Q月能除熱惱, 甚深般若波羅蜜多亦復
如是, 能除一切煩惱熱毒. 又如明月世間樂見,
甚深般若波羅蜜多亦復如是, 一切聖賢之所樂
見. 又如白月日日增長, 諸菩薩衆行深般若波羅
蜜多, 從初發心乃至證得所求無上正等菩提漸
漸増Q長. 又如黑月日日減盡, 諸菩薩衆行深般若
波羅蜜多, 煩惱隨眠漸漸減盡.(「大般若波羅蜜
多經」)
「대반야바라밀다경」의 백월은 한 달의 전
반을 뜻하고 있고,「대방광불화엄경」의 백
월은 보름달을 뜻한다. 특히「대반야바라밀
다경」은 달의 비유로 가득하다. 불교를 낳은
인도의 기후를 생각해 보면 곧 짐작이 된다.
무서운 더위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이글
거리는 태양보다는 밤에 뜨는 달이야말로 더
위를 달래주는 위안거리였을 것이다. 이처럼
백월白月은 ‘반야바라밀’을 비유할 때도,
‘선지식’을 비유할 때도 쓰는 말이었다. 이
처럼 달은 반야바라밀이기도 하고 선지식이
기도 하다. 그러니 달은 반야바라밀을 행하
는 스님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초기의 승탑에 붙은 이름은
거의가 달과 관련이 있다. 성주사의 낭혜화
상백월보광탑朗慧和尙白月葆G光塔은 백월이라
는 말을 그대로 쓴 것이고, 봉림사의 진경대
사보월릉공탑眞鏡大師寶月凌空塔과 실상사의
수철화상능가보월탑秀澈和尙楞伽寶月塔에서
는 보월 즉 보배로운 달이라고 하였다. 보월
은 보월여래寶月如來, 보월보살寶月菩薩이 있
을 정도다. 태안사의 적인선사조륜청정탑寂
忍禪師照輪淸淨塔의 조륜照輪은 비추는 둥근
것 곧 달이다.
이처럼 당시의 선사들은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달과 같은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달도
비유되는 반야바라밀을 추구한 존재들이었
고, 또한 선지식이었던 것이다.
행적行寂
이제‘흰 달이 구름에 깃들었다’는 뜻을
가진 승탑의 주인공인 행적은 어떤 스님이
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스님의 본관은 하
남河南 즉 지금의 하동이고, 속성은 최씨였
다. 832년에 태어나셨고, 바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였고 847년에 복천사福泉寺에서 구
족계를 받고 굴산崛S山의 통효通曉스님에게
서 불법을 수학했다. 870년에 당나라에 가
서 15년 동안 명산을 편력하였고, 수도 끝에
석상경제石霜慶諸 스님으로부터 심인을 받았
다. 885년에 귀국하여 효공왕 때 국사國師가
되고, 915년에 석남사石南寺의 주지가 되었
으나 916년에 나이 85세, 승납 61세로 입적
하였다. 그래서 석남사에 승탑을 만들었고,
954년에 다시 경북 봉화군에 있는 태자사太
子寺에 김생金生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백월
서운탑비가 세워졌다. 특이하게도 승탑과 탑
비가 서로 다른 절에 있다. 신라 말기의 혼란
한 시대였으므로 바로 비석을 세우지 못하고
고려시대에 들어서 비로소 태자사에 비석을
세우게 된 것이다. 이 비석에는 행적스님이
신라 왕실의 도움으로 석남사에 주석하게 된
과정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신덕神德대왕(912∼916)이 큰 뜻으로 빛나
게 다스리고자 은총을 내려 대궐로 불렀다. 정
명貞明 원년(915) 봄에 이르러 대사는 문득 선
승들을 이끌고 제향帝鄕으로 올라왔다. 전례
에 의해서 남산 실제사實際寺에 안주하도록 명
령하였다. 이 절은 곧 이에 앞서 성상이 아직
보위寶位에 오르기 전 황합黃閤에 있을 때 잠
룡潛龍하던 곳인데, 이를 선방禪房으로 만들어
스님께 헌납하여 영원히 선우禪宇가 되게 하
였던 것이다.
이때에 행소行所로 맞아들여 거듭 자비로운
얼굴을 뵙고 이에 모시려는 마음을 열고 거듭
무위無爲의 설법을 들었다. 하직인사를 하고
돌아가려 할 즈음에 특별히 좋은 인연을 맺었
다. 이에 여자 제자가 있었으니 명요明瑤부인
이다. 신라 종실이고 나라의 으뜸 귀족이었는
데 대사를 높은 산처럼 우러르고 불교를 존숭
하여 석남산사石南山寺를 받아서 영원히 머물
러 지켜주기를 청하였다.
가을 7월에 대사는 심히 마음에 흡족하여
비로소 이 절에 머물러 살기로 하였다. 멀리
사악四岳에 이어져 있고 높게 남쪽 바다를 눌
렀으며 계곡 사이로 시냇물이 다투어 흐르니
마치 금여곡金輿谷과 같았고 바위와 산봉우리
가 높음을 다투니 자개봉紫蓋峯인가 의심스러
웠다. 참으로 은일隱逸이 불러들이는 그윽한
곳이고 또한 승려가 거처할 만한 아름다운 곳
이었다.
대사가 두루 영산을 찾아다녔으나 거처를
정하지 못하더니 비로소 이 산에 이르러서야
임종할 곳으로 생각하였다. 다음해(916년) 2
월 초에 이르러 조금 편치 않더니 12일 새벽
에 대중에게 이르기를 “인생이 유한하니 나
는 가겠다. 지켜서 잃지 말도록 너희들은 힘쓰
라”고 하고 승상繩床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근
엄하게 돌아갔다. (중략)
백월서운탑
이 승탑은 체징의 보조선사창성탑과 흡사
하다. 그래서 두 승탑을 비교해서 볼 필요가
있다. 낭공대사의 승탑으로 판명되기 전에도
보조선사창성탑보다는 늦게 만들어진 것으
로 봐 왔는데, 왜 늦게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
하였는지는 궁금한 대목이다.
기본은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이다. 아래로
부터 살펴보면 팔각형으로 된 단정한 지대
석地臺石 위에 역시 팔각형의 하대석下臺石이
올라가 있다. 하대석에는 한 칸씩 건너 사자
상을 조각하였다. 이미 설명한 것처럼 사자
는 불법 수호의 상징이다. 그 위로 창성탑과
마찬가지로 구름 모양을 조각한 중대中臺 받
침이 있다. 창성탑의 구름 모양이 입체적이
고 깊게 조각되어 있는데 비하여, 평면적인
형태로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변
화를 흔히 퇴화라고 한다.
그 위로는 다시 2단의 층급層級을 두었는
데 역시 창성탑에서 볼 수 있었던 출렁거리
는 듯한 역동감을 사라지고 구름 조각 위에
그저 차례대로 올라가 있는 느낌이다. 중대
석의 모양도 창성탑과 마찬가지로 가운데가
다소 불룩한데 그 정도가 더 심하다. 그리고
각 면에는 안상眼象을 새기고 그 안에는 다
시 보상화문을 넣었다. 창성탑에 비해서 좀
더 장식적인 성격이 강해졌지만 역시 새긴
깊이가 얕아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중대석 위로 탑신부가 있는데, 정면에만
문 모양을 조각하고 2개의 문고리와 자물쇠
를 마련하였고, 문 옆에는 구름을 밟고 있는
사천왕이 서 있다. 조각이 세밀한 편이지만
다소 경직된 느낌을 준다. 창성탑과 비교하
면 그 차이가 분명하고, 광배光背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뒤쪽에는 문을 만들지 않았
기 때문에 사천왕을 조각하지 않아서, 8면 중
3면에만 조각이 있다.
그러나 지붕돌은 창성탑에 비하면 훨씬 정
교하다. 처마부분은 얕고 짧은 첫번째 단과
높고 긴 두번째의 단으로 균형있게 처리하고
그 위로 서까래를 새겼다. 가장 큰 특징은 지
붕돌의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고 추녀 끝에
작은 귀꽃을 새겼다는 점이다. 귀꽃은 이후
봉림사의 진경대사 보월릉공탑으로 이어진
다. 이처럼 창성탑의 특징을 이어받고 있는
동시에, 그 다음 시대로 이어지는 새로운 특
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승탑이 창성탑
보다 나중에 만들어진 것으로 본 것이다.
이제 석남사의 부도는 도의선사의 또 다른
부도가 아니라, 낭공대사 행적의 승탑으로서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석남사의 부도가 어
느 스님의 승탑인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후삼국시대라는 혼란기에 승탑과 나
란히 탑비가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