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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도 따라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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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이만주 2009년 02월 324호
해인도 실로 수십 년 만에 해인사를 다시 찾았다.
지금보다 훨씬 젊은 나이로 이곳에 왔었을 때는 가야산 정상에 오르는 것이 무에 그리 대수였는지 가람엔 상관없이 산 오르기에 바빴었다.
긴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찾아 본찰도 살펴보고 큰 스님들이 정진하시던 유서 깊은 암자들을 순례하니 한편으론 마음이 편안하고 가슴에 격정이 와 닿았다
본찰 구광루 앞 섬돌에 서니 예전에 보지 못하던 풍습이 있다.
마당에 사람들이 왔다갔다 한다.
처음엔 일반 사찰에 흔히 있는 탑돌이인 줄 알았다.
관심을 갖고 자세히 보니 땅 바닥에 돌로 미로처럼 겹겹이 줄이 그어져 있고 그 사이를 사람들이 돌고 있다.‘해인도海印圖 따라돌기’라 했다.
나도 따라 돌았다. 1번, 2번..... 5번, 6번.... . 재미 삼아 만들어 놓은 미로迷路가 아니었다. 나는 해인도의 비밀로 점점 빠져들었다.
그리스를 여행 하던 중‘미궁迷宮’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labyrinth’가 생긴 근원지인 크레타 섬의 크놋소스 궁전 유적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몸은 사람이고 머리는 소인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가두어 두었었다던 궁의 한모퉁이에 있는 라뷔린토스 유적에 들어가 보니 건물 안 벽들이 아이들 만화에 나오는 미로처럼 불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어 흥미로웠다.
그러나 이번에 해인도를 따라 돌며 그때를 생각하니 크놋소스의 미궁은 싱겁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인도는 돌면 돌수록 오묘했다. 나에게는 서양의 황금분할이나 이집트 피라밋의 비밀보다도 더 신비로웠다.
만卍자 모양의 비대칭적인 해인도를 따라 걸으면 복잡한 것 같지만 질서정연하다.
입구에서 출발하여 계속 꺾어지는 미로를 따라 돌면 입구 바로 옆에 있는 출구로 나오게 된다.
한편으론 출발할 때도 탑이 있는 중앙을 거치게 되나 마치고 나올 때도 중앙을 거쳐 나오게 된다.
미로의 도형은 모두 54개의 꺾어짐을 갖는데 화엄경에서 선재동자의 구법행求法行 여정인 53 선지식과 비슷한 수를 이룬다.
걸으면 몇 발자국 조금 걸어 꺾어지기도 하고 어느 경우에는 많이 걸어야 꺾어지는 것이 지나온 삶의 역정 같기도 하고 앞으로 살아 나아가야 할 인생같이도 느껴진다.
걷는 동안 별로 크지 않은 공간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것 같던 이를 가까이서 만나게 되고, 같은 사람을 가까이서 스쳤다가 멀어지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다시 가까이 스치게도 된다.
인연因緣의 묘한 이치를 깨닫게 해 준다.
계속 한 쪽으로만 돌면 인체의 평형감각에 문제가 생겨 어지러움을 느끼겠지만 묘하게도 오른쪽으로만 도는 가하면 어느 지점에선 왼쪽으로 꺾어 돌게 되어 전혀 어지럽지 않다.
해인도는 법계도法界圖,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라 불리는데 화엄사상이 법계연기론法界緣起論임에서 비롯된다.
또한 법성도法性圖, 법도장法圖章 등으로 일컬어지며 삼국유사에는 법계도서인法界圖書印이라 기록되어 있다.
해인도는 의상대사가 지으신 7언30구, 총 210자의 법성게法性偈에서 비롯된다.‘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 법의 성품 원융하여 두 모양이 본래 없고’에서 시작하여‘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예로부터 변함 없어 그 이름 부처라네.’로 끝난다.
의상대사가 광대무변한 화엄사상을 짧은 게송偈頌으로 축약해 놓은 것이다.
법성게는‘하나의 티끌과 우주, 한 순간과 영원이 상통相通한다’는 진리의 본체를 설명한 자
리행自利行,‘부처의 자비가 중생들에게 한없이 미친다’는 진리의 공덕을 서술한 이타행利他
行,‘수행자가 망상을 끊고 진리를 깨닫는 순간 중생은 본래부터 부처인 것을 알게 된다’는 수행의 3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의상의 스승인 지엄화상이 입적하기 몇 달 전인 670년 7월에 저작된 것으로 전해지는 법성게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얽혀 있다.
의상이 당나라에 가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에서 지엄으로부터 화엄을 수학할 때 스승의 명으로 처음 십승장十乘章 10권을 엮어 스승에게 감수를 청하니 지엄은“뜻은 아름다우나 말은 오히려 옹색하다”했다.
지엄과 의상이 함께 부처님 전에 나아가“원컨대 부처님의 뜻에 계합된다면 타지 말기를 바랍니다”하며 불살랐더니 다 타고 210자가 남았다.
의상이 그 글자들을 추수려 모아 간절한 염원과 함께 다시 불길 속에 던졌으나 더 이상 타지 않았다.
지엄은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여 칭찬해마지 않았고 의상은 며칠 동안 문을 걸어 잠근 채, 7자로 된 30구절을 완성하니 방대하고 어려운 화엄사상을 짧고 쉽게 210자로 축약한 불후의 게송이 되었다.
이는 또한 의상의 비범함과 학덕을 나타내는 증명이기도 했다.
해인도를 따라 중앙에서 법(法)자로 시작하면 마지막은 법(法)자 바로 아래에서 불(佛)자로 끝난다.
그것은 각기 수행의 처음과 끝을 상징하는 것으로 두 글자를 중앙에 둔 것은 가장 중요하며 시작과 끝이 같음을 의미한다.
구광루 앞의 해인도를 따라 걸으니 내 걸음으로는 420보가 된다.
25번을 돌게 되면 만 걸음을 넘게 걷게 되는 셈이다.
해인도를 조성함에는 많은 공간이 필요치 않다. 가로 세로 50m의 공간이면 족하다.
나무로도 해인도를 조성해 봄 즉하다. 삼림욕 효과도 있을 것이다. 해인사에서 시작된 해인도 따라돌기가 널리 보급되어 사람들이 많이 걸었으면 한다.
열심히 따라 돌면 사람들의 건강증진에도 유익할 것이며 더욱이 업장소멸도 할 수 있고 깨달음에도 이를 수 있다니 그 얼마나 좋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