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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인물열전(人物列傳)-경허(鏡虛)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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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90년 11월 105호
경허스님께서는 견성한 이듬해 봄에 연암산 천장사(天藏寺)로 옮겨 보임(保任)에 들어갔다. 스님의 보임생활은 두타행 바로 그것이었다. 한 벌의 옷과 고된 정진으로 마침내 서른 셋 6월에 일대사(一大事)를 요달해 마치고 주장자를 적어 던지며 오도가(悟道歌)를 읊었다.
스님이 옮은 오도가는 오늘날도 선방 수좌들에게는 자주 회자되는 명문(名文)으로 선이 굵고 담백하면서도 불법의 진수를 그대로 드러낸, 문학적 향기마저 높은 깨달음의 절창(絶唱)이다.
오도가 말미에 다음과 같이 부친 칠언사구는 스님의 깨달음의 실체를 집약해 놓고 있어 여기 소개할까 한다.

忽聞人語無鼻孔
頓覺三千是我家
六月鷰巖山下路
野人無事太平歌

홀연히 코구멍이 없다는 말에
문득 깨달으니 세상의 집은 모두 내집이고녀
유월 연암산 아래 길의
들사람은 무사 태평가를 부르는구나.

이후 스님의 일생은 구름처럼 떠돌면서 중생교화로 이어진다. 천장사와 수덕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을 오가며 호서(湖西) 일대에 선풍(禪風)을 진작시키는 한편 부산 범어사와 해인사 등 영남일대에도 선원을 개설케 하며 법주(法主)로 추대되어 선승들을 제접하면서 수선결사(修禪結社)를 일으키고 고불고조(古佛古祖)의 삶을 본받아 새로운 선원 청규를 만들어서 선계(禪界)의 중흥조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진력하였다.
당시에는 염불과 주력 등 주로 타력신앙에 치중되어 있었므으로 조계이래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간화대오(看話大悟)의 선풍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었으므로 개오견성(開悟見性)을 주창하며 실참실구(實參實究)의 선풍은 일시에 조선불교에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드디어 스님의 선풍진작은 가문 땅에 단비가 내리듯 오랜 동안 발아(發牙)를 멈추고 있던 선의 기둥들이 새 세상을 향해 힘차게 자라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오늘날도 선가(禪家)의 거울이 되고 있는 만공(滿空), 혜월(慧月), 한암(漢岩), 수월(水月) 제산(齊山)스님 등은 경허스님 뒤를 이어 이 나라 불교계의 동량이 되었던 선사들의 법호들이다.
이들에 의하여 이 땅의 불교가 얼마나 풍성해졌으며 선가(禪家)의 뜨락이 갖가지의 꽃으로 얼마나 아름다웠는가? 지금도 한국 선불교는 그들의 영향 아래 있지 않는가. 실로 경허선사의 출현은 백화(百花)도량을 이루는 젖줄이요 터전이었다.
스님께서 세상사를 초월, 운수가 되어 제방의 선납(禪納)을 제접하고 이 산 저 산을 떠돌아 다니는 시간에 세상은 어지럽기가 짝이 없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결과적으로 양이(洋夷)와 일제(日帝)를 합법적으로 불러들이는 결과를 낳았으며 양이와 일제․청․러시아 등 외세(外勢)와 양반지주들에게 시달리던 농민들은 동학혁명의 횃불을 높이 들었으며 동학혁명의 실패는 본격적인 일본 제국주의가 숨겨 둔 침략적 근성을 노골화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제일 먼저 우리의 고유한 사상과 우리의 문화를 정복하려고 하였다. 한민족 고유의 정신적 지주이며 오랜 귀의처였던 한국불교를 그들 침략에 이용하려 하였다.
일본의 문화단체 특히 불교단체는 처음에는 같은 동류(同流)라는 친밀감으로 한국불교의 약점을 파고들어 일본 불교화에 무던히 힘쓰고 있었다.
최초로 일본불교가 이 땅에 상륙한 것은 일본불교 진종(眞宗)의 승려 오쿠무라(奧村圓心)가 부산에서 포교를 시작한 이래 원산과 인천․목포의 등지의 개항도시에 일련종(日運宗) 계통의 승려들이 포교당을 세우며 정토종을 비롯한 일본불교의 마수(魔手)가 서울에까지 포교당을 세움으로써 드디어 승려도성출입 금지령이 해제되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1897년에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는 등 역사의 수레바퀴는 급선회를 계속하고 있었다.
대체로 경허선사가 해인사에 머무신 것은 50세 전후이니 스님 중년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1899년 국왕의 명으로 해인사 대장경을 인각(印刻)하여 모실 때 스님께서 증명으로 계셨던 기록이 남아 있으므로 이때 스님께서는 조실로 계셨던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해에 스님께서는 ꡐ결동수정혜동생도솔동성불과계사문(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稧社文)ꡑ을 짓고 결사정신을 선양했다.
스님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결사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 결사정신은 경전 속에 나타나는 불보살의 발원성도(發願成道)의 의지로부터 중국 혜원의 여산결사(盧山結社), 백낙천의 향산결사(香山結社), 보조국사의 정혜결사(定慧結社), 등을 본받았으며 그 결사정신에 모든 범성(凡聖)이 동참하기를 바라고 있다.
대체로 이제까지의 결사가 승려 중심인데 비하여 스님의 결사에는 승속(僧俗)․남녀․노소․현우(賢愚)․귀천(貴賤)을 가리지 않았으며, 또한 친소(親疎)․이합(離合)․원근(遠近)․선후(先後) 묻지 않고 모두 함께 동참하기를 허락하고 권고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삿된 마음으로 결사에 참여하려는 사람(欺心入道者)이나 흉악한 범죄자, 아주 고질적인 병을 가진 자, 결사 취지에 전혀 협력하지 않을 자가 들어와서는 안된다고 못박고 있으며, 이러한 규제와 함께 일상의 수행 일과인 염불과 공양에도 정성을 다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그리고 결사문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ꡐ정(定) 과 혜(慧)를 같이 닦아 도솔천에 함께 오르며 거듭거듭 날때마다 늘 함께 도반이 되어 구경에는 같이 정각을 이룰지어다(同修定慧, 同生兜率, 世世同爲道伴 究竟同成正覺)ꡑ라고 결사의 의지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결사운동은 간화선의 실참실구(實參實究)를 그 중심으로 하였으나 어느 하나만을 위주로 하는 결사운동이 아니라 포괄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특색으로 들 수 있다.
선정은 물론이며 교학의 연구나 정토행 즉 극락왕생을 향한 염불수행까지도 함께 결사운동에 포함시킴으로써 그 범위를 확대시켰으며 나아가 즉 ꡒ정혜결사에 있어서 결택을 분명히 하여 참으로 수행만 할 수 있다면 꼭 한 곳에 모이지 않아도 무방하다(若決擇分明 能於定慧 用眞修行者 不會一處 亦不妨事)ꡓ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정혜결사에 있어서 결택과 수행만 확실하다면 장소에 구애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결사의 근본정신이 장소에 있지 않고 외적인 공간적 의미보다는 내면의 세계에 그 비중을 둔다는 것을 천명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