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월, 꽃바람이 기다려진다. 아직은 한 걸음 떨어져 있는 봄, 나비대신 빗줄기 먼저 찾아와 매화나무에 방울방울 얹혔으면 좋겠다. 메마른 나뭇가지 꽃봉오리 열리고 천지사방 매화향기 퍼지면 그 향에 봄이 실려 올텐데......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가 쌍계사자락에 둥지 튼 젊은 부부의 봄날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미국발 금융위기를 견뎌내야만 하는 이 땅의 사람들은 변화를 두려워하면서도 변신을 꿈꾼다.
그 변화중의 하나가 귀향, 또는 귀농이다.
수십 가지 이유를 붙여가며 망설이고 있는 도시 사람들에게 포장되지 않은 날것의 소리를 들려주는 김병진, 안자미 내외. 그들에게 팍팍한 서울살이는 그날이 그날이었고, 50대가 되면 고작해야 30평 아파트에 자동차 한 대쯤 장만해서 지루한 삶을 살아가겠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꿔보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난 지 일주일 만에 둘 다 직장을 그만두고 탈서울 하면서 느슨한 삶을 꿈꾸었다.
준비 없이 용기만 한 아름 안고 온 이들을 어머니같은 지리산이 넉넉히 품어주었고 섬진강 맑은 물이 어서오너라 어서 오느라 받아주었다.
아무리 봐도 커피와 와플이 어울릴 것 같은 김병진의 아내에게 살짝 물었다. 여성이라면 누구라도 한 송이 꽃이길 바라고 주인공이었으면 하는데 시골살이를 후회하지 않느냐고, -저는 지금도 제 삶의 주인공이고 서울에서도 주인공이었어요. 주인공은 내가 만들어가는 거죠. 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아! 꽃같이 예쁜 그녀의 이어지는 이야기, -다들 아이 교육생각해서 강남으로 이사 가는데, 저는 우리 아들이 어린시절에 풍부한 감성과 정서를 지닌 자연을 닮은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 싶어서 다른 엄마들이 강남 가듯이 지리산을 선택했거든요.- 쑥차를 내던 병진씨가 거든다.
-우리 옆지기 (안자미씨를 이르는 말, 별밤지기, 산지기, 십년지기..)가 지리산을 되게 좋아해요.
나중에 바가지 덜 긁히려고 이왕이면 지리산을 우리 삶의 배경으로 했지요.- 쌍계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은 방과 후 보육교실에서 진행되는 그림공부, 한문공부를 신나게 따라하고, 맛난 간식도 먹어가며 쌍계사에서 마련한 어린이법회를 통해 부처님과의 인연도 지어간단다.
조금 과장해서 온 국민이 걱정하는 영어공부는 어떻게 하느냐했더니 영어가필요하면 그때 걱정하겠노라고, 지금 도시사람들의 주된 화제는 구원이나 해탈, 지금행복하기 보다는 주식과 펀드, 자녀교육, 건강문제, 부동산 등인데 시골살이 하는 이들의 주요관심사는 어떤 것일까....가 궁금했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은 봄날 햇살처럼 가볍고 순했다.
부동산이나 펀드보다는 쑥 캐러 같이 갈 동네할머니 감기는 좀 나으셨는지, 산 벚꽃 필 때쯤 채취할 차나무에 별 탈은 없는지에 마음이 실린다.
먼 미래는 생각지 않고, 다만 이 순간에 젖어 살며 새로운 가능성은 언제, 어느 곳으로나 활짝 열어두고 있단다.
이들과 함께하는 동안 왜 갑자기 아모르 파티(Amor Fati), 카르페디엠(Carpe Diem) 같은 라틴어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닐까?
그렇다고 이들의 하동살이를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섣불리 이삿짐을 싸지는 마시라. 산과들이 주는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시골인심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환상은 일주일 만에, 늦어도 한달이면 무너지고, 그리하여 다시 짐 꾸린 이들도 많으니.
이들에게 위기는 없었을까?
-나름 고급인력이라 생각했는데 일정한 수입도 없지, 막노동도하면서 수제차手製茶 배우려고 남의 집에서 군불 때고 설거지 해주고 청소하면서 어찌나 서럽던지 2년 만에 도망갈 생각도 했었죠.- 왜 아니 그랬을까. 그래서 한 번 더 자신에게 물어봤다. 사실 우리는 세상에 길들여지기 시작하면서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다. 어쩜 귀 기울여 들으려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해서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억도 이미 잊혀진지 오래다.
병진씨는 지금 떠나는데 미련 없느냐고 자신에게 물으며 가슴의 소리를 따르고 싶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살아보자 한 것이 이제 자리를 잡은 듯하다. 밥 먹고 사는 것은 서울이나 다름없지만 상사의 명령이나 지시가 아닌 자신이 주체가 되어 사는 삶이 행복으로 느껴진다고.
가령 오늘예정한 풀 뽑기를 하루쯤 미뤄도 보고서 작성을 하지 못해 생기는 스트레스 같은 것은 아니란다. 쌍계사가 지근거리에 있기에 예불이나 법회에도 꼬박꼬박 나가느냐 물었더니 -굳이 법당을 찾지 않아도 처처에 부처님 계시고 사방천지가 불교에요.
평소 추구하던 불교적인 삶이 지금 그대로구요. 고정된 관념의 불교가 아니니따로 불교 할 것이 없어요.
- 자미씨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 마음이 가득해진다.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 부처님 앞에서는 부처님이 되고, 꽃 앞에서는 그 꽃이 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4인 가족이 세상을 살아가자면 평균생계비용이 100만원 정도이고 그 나머지는 과시용 또는 보여주기 위한 체면치레인 사회적 비용이라고 한다. 귀농을 염두에 둔 사람이라면 이 젊은 부부가 생존비용과 사회적 비용을 어떻게 감당해내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돌아온 병진씨의 답변은 새털 같다. -생계가 달려있으니 돈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어요. 하지만 하고자하면 다 가능해요. 차 농사짓지요. 농한기에 막노동도 하지요. 일 꺼리 없을 때는 취미로 시작한 목가구도 만들죠. 그러면서 가끔 영화구경도 가고 피자도 먹어요.- 차 전시장 겸 다실인 자미다원에는 그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책장이며 책상, 차탁이 정겹다. 좋아서 하는 일이 어느 날부터 수입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인데 ‘천지도 모르는 것들’이라 걱정하시는 양가부모님의 소망이기도 하리라. 병진씨의 아내 자미씨는 출판사에서 편집을 했던 전공을 살려 얼마 전에 <천지는 꿈꾸는 집이어니>라는 제목의 월암당 정대스님 법문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컴퓨터 덕분에 산골마을에서도 책을 만드는 일이 가능하다고, 그리고 몸을 움직여 일하는 동안 기획안이 만들어지는 것이 더 기쁘다는 그녀, 경제적으로도 그렇지만 이렇게 저렇게 마음이 상하고 가난해지는 현실에서 두 사람이 함께 세상을 바라보면 더욱 풍요로워지고 지혜로워지며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자리다. 도시사람들이 매화를 탐하러 섬진강을 찾아들 무렵부터 차(茶)철이 시작되니 꽃 시절이 그들에겐 농번기란다. 하동포구에서 이어지는 십리 벚꽃 길에 차들이 이어지고 사람들로 넘쳐날 때면 산골마을에는 먹거리도 지천이어서 아내는 그것들을 얌전하게 장아찌로 만들고, 남편은 차 따서 상품화 시키느라, 만개한 꽃에도, 온갖 사람에도 무심해진다.
무심과 바쁨이 계속되던 언젠가 봄비 오던날, 그날 딴 차를 다 비비고 덖어서 건조대에 올려놓고 나오니 비는 개이고 새벽으로 향하는 시각이었는데 그 황홀함이라니.
하늘에 별은 총총하고 부윰한 기운사이로 지리산 능선이 안개와 함께 켜켜로 보이는데 온몸에 배인 차향도 차향이지만 정화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 이구나를 느낀다.
창문을 열고 별을 바라보면 우주를 향해 문을 여는 것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산골마을에서 별과 산과 하늘과 안개를 온몸으로 대면한 그들은 천년이 넘은 햇살아래 만년을 이어 내려온 바람을 맞으며 오늘도 주인공 되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