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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연무위와 소연절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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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샘 - 능인 김계유 / 한학자 2009년 03월 325호
고려 말 승려였던 혼수混修는 호가 환암幻庵이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나이 열 셋에 집
안의 아저씨를 따라 사냥을 하며 살았다. 어느날 그가 사슴 한 마리를 쫓고 있을 때였다. 그가 쫓는 사슴은 자기에게 쫓기면서도 문득 뒤를 돌아보며 무엇을 기다리는 낌새였다. 환암이 지켜보니 잠시 뒤 그 앞에 새끼 사슴이 한 마리 나타났다. 혼수는 그것을 보고 느끼는 바가 매우 컸다.
“짐승이 그 새끼를 생각하는 것이 사람과 무엇이 다른가.”
환암은 곧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렸고 활을 그 사슴에게서 거뒀다. 그리고 그는 그 길로 절로 가서 스님이 되었다. 이처럼 출가동기가 남달랐던 그는 불경 등의 공부를 열심히 하였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나무 열매를 먹고 베옷 차림으로 협불점석脇不霑席(일종의 장좌불와이니 갈비뼈를 땅에 붙이지 아니하고 앉아서만 공부를 한다는 뜻) 뼈를 깎는 두타행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이렇게 산문 안팎의 주목을 받는 수행자로서 일생을 마칠 듯하던 그는 결국 속가로 돌아섰다. 집을 떠나오던 당시 대문에 의지해 자기를 쉽게 떠나보내지 못하던 어머니 생각 때문이었다. 그때 그는 속가로 돌아서면서 게송을 읊었는데“바위 앞의 소나무에게 내 맹서하노니 다시 와서 너와 더불어 일생을 마치리라.”고 하였다. 그 뒤 그는 식영암息影庵에게 사사했는데 능가경을 배우면서 모든 중들이 그 거죽만을 핥았음에도 오직 그만이 홀로 깊은 경지를 터득했다는 평이 전해온다. 당시 공민왕은 도량을 광명사에 세우고 나옹으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당시의 납자들로는 당에 오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는 해가 저물어 행사가 파할려고 해서야 그곳에 도착했는데 몸이 불편한 가운데서도 공민왕은 그의 출현을 기다렸다는 듯이 반기며 맞이하였다. 그러자 늦게 나타난 그를 상대로 나옹은 일련의 선구로서 그 경지를 시험하였다.
“어떤 것이 그대의 문을 대하는 제일구인가?”
“좌·우 중에 떨어지지 않고 중간에 섰노라.”
환암의 대답이었다. 나옹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문에 드는 일구는 무엇인가?”
“들어왔지만 들어오지 않았을 때와 같다.”
“문안에 들어왔을 때는 어떤가?”
“안팎이 본래 공허하거늘 어찌 들어섰다 하겠는가?”
환암의 답이 있고 나옹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산은 어찌하여 봉우리의 기슭에서 끝나는가?”
“높은 것을 만나면 곧 낮아지고 낮은 것을 만나면 곧 끝나느니라.”
나옹은 몇 가지 질문을 통해 그를 다구쳐 시험했고 그의 대답 역시 거침없었다.
뒷날 그는 우왕에 의해 왕의 스승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소식에도 기뻐하지 않고 다만 게송으로 자신의 심정을 대신하였다.
“삼십년 간 속세에 들지 아니하고
물가와 수풀 밑에서 참된 성정을 길러 왔거늘 누가 시끄러운 인간사를 가지고 소요 자재하는 이 몸을 속박하고자 하는가.”
한편 일본 국사인 승려 문계文溪에게 다른 사대부들과 더불어 시를 건냈을 때였다. 그 시의
내용 가운데 쇄연무위라는 구절이 있었다. 수국고정水國古精 쇄연히 무위無位의 사람이로다. 불을 끄듯 급히 치달음도 응당 스스로 그칠 일이요. 고목처럼 섰으니 다시 누구와 친하리요. 단풍 든 산봉우리에는 구름이 발 아래에서 일고 분성에는 달빛이 성문에 가득하도다. 바람 맞은 돛은 해천이 넓고 매화와 버들은 옛 동산의 봄이로다. 이를 당시 조정에서 문형의 벼슬을 맡고 있던 춘정 변계량이 첫구 쇄연무위灑然無位를 소연절세蕭然絶世로 바꾸어 보냈다. 스님은 그 말에 변공이 참으로 시를 모르는 사람이라며 어찌 소연蕭然이 쇄연灑然1)만 하며 절세絶世가 무위無位만 하냐면서 그것은 그가 써 보낸 시구 안에서 쇄연무위灑然無位의 뜻만 깎아 없앨 뿐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변계량이 뜯어 고친 소연절세蕭然絶世란 쓸쓸히 세상과 인연을 끊은 사람이라는 시각을 강조하고 있다. 불교적인 깨달음을 생명으로 여기는 스님의 입장에서는 당치 않은 수정이었다. 쇄연무위灑然無位란 삶의 본질적인 사고 시비 분별을 떠난 자기 자신의 불교적인 깨달음을 읊은 것이기 때문이다. 선의 게송은 이렇듯 수행자의 전부를 보여준다. 그는 임종게에서도 쇄연무위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는 홀열히 열반에 들었다. 천운에 몸을 맡기고 일생을 보내니 병중의 소식이 또한 분명하구나. 아무도 나의 돌아가는 곳을 알지 못하리니 창 밖에 흰 구름이 푸른 병풍에 비꼈도다.
1) 쇄연灑然-물을 뿌린 듯 깨끗하여 속진에 물이 들지 않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