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비슷한 습관을 가진 사람들은 책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흔적을 남기곤 한다. 책장 사이에 엽서나 쪽지, 나뭇잎이나 꽃잎, 극장 티켓을 끼워두기도 하고, 책장의 한 귀퉁이에 짧거나 긴 어떤 문장을 남겨놓기도 한다. 책의 구석구석에 새겨 넣은 문장이 일기보다 더 진솔하게 읽히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작심하고 썼다기보다 거의 우연의 산물이고, 또 책을 읽기 전후의 감상이 휘발성 없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기에 그러하다. 반대로 오래전 읽은 책을 꺼내다 발견한 글귀들은 대개 누가 썼는지 모를 만큼 낯설거나 때로 당혹스럽기까지 할 경우가 많다. 당연하다. 그 책을 읽었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나 자신 사이에는 그만큼의 간격이 있으므로. 그 간격은 끊임없이 우리를 마모시키거나 변화시키거나 단련시키거나 또
는 무모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독자는 그 애정을 홀로 적요로이 머리와 마음으로만 간직하면서 자신이 아끼는 책을 원본 그대로 두는 것을 최대의 찬사로 바치곤 하는 것이다.
문제는 자신의 취향만이 올바르며 당연하다고 믿는 편견이요 오만에 있다. 그런 불순한 잣대 때문에 곤혹을 치르거나 갈등을 겪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죽어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며, 어느 독실한 기독교 신자는 종교가 없거나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향해 거침없이 멸시 혹은 긍휼의 시선을 던지곤 한다. 더 나아가 보수는 진보를, 진보는 보수를 서로 멸시하며 헐뜯기 일쑤다. 뿐만 아니다. 채식과 육식 사이에서, 동성애와 이성애 사이에서, 좌편향인가 우편향인가 사이에서
우리는 매일 옥신각신, 줄을 당기며 살고 있다. 안팎으로 사람들은 자신만의 성이 좀 더 아름답고 견고하게 세워지기를 바라며, 그 성 안에 아무나 멋대로 침범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족끼리만 소통한다면, 같은 종교인끼리만, 같은 음식을 먹는 사람끼리만 관계를 맺는다면, 한가지 색깔의 음악과 영화만 존재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심심하고 재미없을 것인가.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은 그 성에 자신이 원하는 누군가를 초대하기 원하며, 그와 함께 만찬을 즐기거나 허물없는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 우리 모두는 사랑받고 싶고, 이해받고 싶고, 관계하고 싶어 한다. 시간과 추억을 나누고자 하며, 상호작용을 맺고 싶어 한다. 앞서 언급한 파울로 코엘료의 글에서처럼, 사람은 누구나 이미 하나의 우주요 세계이다. 나와는 다른 그의 취향을 이해하고 편견 없이 바라보기. 그것은 서로 취향이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즐길 맛있는 음식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해서 최상의 식단을 찾아내는 과정이며, 그런 과정은 좋은 영화를 고르는 일, 어떤 전시회를 갈까 고민하는 일처럼 설레는 시간이다. 그것이야말로 ‘타인’이라는 한 우주를 만나는 데 드는 최소한의 비용이라고 나는 믿는다.
마의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