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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의 정신, 활발발活潑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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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의 향기 - 월암 2009년 03월 325호
월암 스님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도를 깨우쳤다는 지리산 벽송사.
이 밖에도 조선불교의 선맥을 잇는 벽계 정심, 벽송 지엄, 부용 영관, 경성 일선, 부휴 선수, 청매 인오, 환성 지안, 회암 정혜, 경암 응윤, 서룡 상민 스님 등 역대 조사들이 이 곳 벽송사에서 수행교화하여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루었다.
이런 명성 탓에 한때 최고의 수행처로 손꼽혔다는‘108조사 행화도량’벽송선원. 이곳 선원장으로 주석하며 명안도인들의 수행역사를 잇는 산철결재 공부모임, 벽송선회를 이끌어가시는 월암
스님을 만나봤다.
이며 종단에서는 간화선에 대한 논객으로도 이름난 스님이기에
인터뷰를 위해 벽송사를 찾는 마음이 사뭇 긴장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스님은 스스로를‘촌 중’이라 낮춰 부르며 호방하게 웃어주신다.
동안거를 끝낸 요즘이지만 스님은 오는 3월 28일로 예정된 벽송
선회를 위해 강의 준비가 한창이셨다. 스님이 이번에 강의할 내용은
육조단경을 사상사적 측면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문제이다.
“육조단경은 선종사의 분기점이 되는 중요한 사상서입니다. 단경이
전의 사상이 단경이후에 어떤 사상으로 전개되고 있는가? 하는 것인데요
첫째 단경이전은 그야말로 섭선 위주 즉 앉아서 좌선을 닦는 것을 선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도를 깨우쳤다는 지리산 벽송사.
이 밖에도 조선불교의 선맥을 잇는 벽계 정심, 벽송 지엄, 부용 영관, 경성 일선, 부휴 선수, 청매 인오, 환성 지안, 회암 정혜, 경암 응윤, 서룡 상민 스님 등 역대 조사들이 이 곳 벽송사에서 수행교화하여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루었다. 이런 명성 탓에 한때 최고의 수행처로 손꼽혔다는‘108조사 행화도량’벽송선원. 이곳 선원장으로 주석하며 명안도인들의 수행역사를 잇는 산철결재 공부모임, 벽송선회를 이끌어가시는 월암스님을 만나봤다.
수행으로 삼았다면 단경으로 부터는 선이 생활 그 자체가 되는 생활선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수행자와 일반인의 생활철학이 되었다는 거지요. 북종의 신수스님이 상류층 제도권불교의 대표주자라면 혜능스님은 방에서 서민들과 함께 선 수행을 해야하니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게 됐단 말이에요.
밭에 가서 일해야하고 산에 가서 나무해야 하는데 편안히 앉아가지고 좌선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선방에 편안히 아 있을 여가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혜능스님은 혁명적은 전환을 시도했어요. 좌선의 개념을 바꿔버린것입니다.
좌선할 때‘좌’란 몸이 앉는 것이 아니다. 일체경계에서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좌’다. 선이란 우리의 본성이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이다. 생활있는 그 자체에서 일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경계에 매몰되지 않고 자기본심을 지켜나가는 것이‘좌’다. 그야말로 생활이 그대로 수행이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조사선이 바로 단경으로부터 태동된다는 것입니다. 단경에 \'나에게 한 물건이 있으니 위로 하늘을 받치고 아래로 땅을 딛고 밝기는 일월보다도 밝고 어둡긴 칠탕보다도 어둡되 동정간에 항상 나와 함께하는 그 물건이 무엇인가\' 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이 이 한물건이 무엇인가하는 근원적인 공안의효시가 되는 것이지요, 여기에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라고 하는 사상이 간화선 수행의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즉 간화선 이전에 간화선적인 수행의 요소가 없었던 것이 아니고 혜능스님의 근원적인 문의식으로서의 선문답을 전개해 가지고 깨달음으로 이끈 것입니다.”
간화선의 태동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생활 속에서 자유롭게 수행하는 실참실구의 정신에서 나왔
다고는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선 수행은 일면 깨달음 지상주의에 편향되어 일체 현실을 놓아버리고 오직 정진에만 몰두하는 측면이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 대해 스님은 불교를 너무 어렵게 만드는 요소라고 지적한다.
\"조사스님의 말씀 중에 \'물고기가 용이 되어도 비늘은 바뀌지 않고 사람이 부처가 되어도 그 모습은 바뀌지 않는다.
\" 수행해서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생사없는 도리를 깨달아가지고 일체 중생에게 회향
되는 그런 수행과 깨달음의 모습이어야지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들어갔을 때 그 수행자의 삶이 무화無化되어가지고 그야말로 별천지의 딴 세상으로 진입한다는 그런 의미의 깨달음은 절대 아닙니다.
내가 수행하고 있는 자체가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하고 화두를 들고 있는 것 자체가 행복해야 한단 말이야. 깨달음을 위해서 몸도 마음도 괴로운 것을 참고 인욕하고 고통을 참아서 뒷날 깨달음이란 행복을 얻는 의미가 아니란 말이야. 설사 깨닫기 전이나 이후라도 우리 인간의 삶을 그야말로 행복한 삶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거죠.
화두를 듦으로 해서 드는 그 자체가 행복이어야 하고 수행하는 것자체가 행복이어야 하고 그리고 수행을 통해서 내 삶이 끊임없이 질적인 변화를 가져와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어제 원수진 사람들이 화두참선을 통해서 풀어지게 되고 인간관계가 더 원활하게 되고 너와 내가 둘
이 아님을 깨우치게 되고, 상생되어지는 우리 인간관계가 생명과 생명이 생명의 실상을 깨우치자고 하는 것이참선이니까.
그야말로 생명의 실상에서 봤을 때는 우리가 부처라고 하는 동일지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야말
로 서로가 존중하게 되고 서로가 서로를 위하게 되고 배려하게 되고 결국 참선한다는 것 자체가 생활이 되고 그자체가 순간순간 행복으로 바꿔져 나가는 것입니다.”
간화선을 행복선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스님의 설명을 들으며 그간 바쁜 일상을 핑계로 멀게만 느껴졌던 선 수행이 가깝게 다가온다.
최근 정부의 종교편향과 관련하여 지난해 8월 열린 법불교도대회를 치루고나서 많은 스님들과 신도들이 우리 불교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깊은 성찰을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 불교가 사회 현실과 너무 괴리된 가운데 벌어진 현상이라는 자성론이 대세를 이루면서 곳곳에서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되찾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월암스님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수행자 정신의 정립과 그를 통한 간화선의 대중화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세상과 함께 호흡하지 못하고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지 않는 선 수행은 아무리 훌륭한 사상이라도 박물관에 보존되는 죽은 사상일 뿐입니다. 실천 없는 선은 노파선, 고목선이라고 비판받습니다.
우리 대승불교의 이상이 중생구제를 통한 불국토 건설인 만큼 깨달은 자의 모습은 나만의 행복이 아닌 세상을 향한 실천과 용기를 지녀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우리 수행자들은 각자 자기 점검이 필요할 때라고 봅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1700공안이 깨닫기 위한 최고의 화두가 아니라 하나의 대안이라는 인식도 함께 했으면 합니다. 그때 시대를 살아가는 선사들이 당시의 아픔과 당시에 느낀 지혜로서 당
시의 언어로 던진 그 말에 매여, 우리 스스로를 선방에만 가둬두고 혜능 이전의 좌선만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를 박물관에 가두는 것과 진배 없습니다. 박물관 수좌라는 말이 여기서 나옵니다.
살아있는 마네킹인 것이죠. 자존심 상하고 뼈아픈 말이지요. 이제 세상의 모든 것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참구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를 함께 새겨보고자 이번 벽송선회에서 육조단경을 교재로 선택한 것입니다. 시대 정신을 잃은 간화선은 간화선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요즘 남방의 수행법인 위빠사나 수행이 인기를 모으면서 간화선 수행이 마치 여법하지 않은 수행법으로 매도되는 현실도 스님을 안타깝게 하는 요인 중 하나다.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결코 둘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깨달음으로 향하는 두개의 길입니다. 다만 시대를 사는 중생의 근기에 맞춰 정법의 흐름이 방편으로 설해져서 그런 것이지, 결코 다를수 없습니다. 이들은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하면서 한국불교의 수행전통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부처님 법을 따르는 수행자로서 방편을 놓고 옳고 그르다, 최고다아니다라는 논쟁은 불교 대중화의 염원을 거스르는 매우 소모적인 일이기때문이다.
“남방의 부파불교는 대승비불설과 더불어서 간화선 비전통설을 주장한단 말이에요. \'부처님 당시에 무슨 참선이 있냐면서 중국에서 만들어진 비전통적인 수행법이다\'라고 비판한다 말이죠. 우리 북방의 대승에서는 소승이라고 폄하해 버수행자의 향기리고 \'간화선 수행이 최상승 선이다\'라고 주장하고. 이것은 양자가 다 잘못된 시각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왜냐? 중국의 선종이 대승불교를 토대로 이루어진 실천사상인데다 표의문자인 중국 문자만의 특수성이 있단 말이에요. 그 사람들에게 익숙한 언어로 본래면목이라는 표현을 쓴 거죠. 본래면목이라는 것은 진리의 본래모습을 말하는 거예요. 진리의 실상, 본래모습을 말하는 것이지 본래 마음 너머에 있는 아트만적인 실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문자 표현상의 문제이지요. 단경에 나오는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 라던가 자성청정自性淸淨이라던가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던가 이런 것들이 이후에 조사선이나 간화선에 토대가 되는 단경의 사상인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부처님께서 전하시는 초기의 교설과 대승불교에서 말하는반야, 유식, 공, 중도, 이런 사상과 선의 실천사상과 회통적인 시각에서 봐야만이 불교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안목이 나오는 것이지 지역적인 것만 보고 선을 긋고 저것은 다르다고 봐버리면 안되죠. 불교가 석가모니 부처가 친설하신 아함 교리만 불교라고 말할 수 없잖아요.
이 시대 성철스님에 이르기까지 역대 깨달은조사 혹은 부처님으로부터 조사에 이르는 깨달은 분들의 어록이라던가 그 모든 것들을 통칭해서 불교라고하는 것이지, 역대 조사가 깨우치고 난 뒤에 부처님의 제자로서 부처님의 말씀에 부연해서 어떤 조화를 편것 아닙니까?
깨닫고 난 후에 부처님 제자가 아니다, 난 나대로 조사니까 조교다 이런 식은 아니죠. 어떤조사가 어떻게 방편을 했다는 것은 불교의 태두리 안에서 이야기 되어진 것이고 그 전체를 팔만대장경이며 불교라고 해석을 해야지 초기 아함경만, 부처님께서 친설한 것만 불교라고 해버리면 불교의 역사연기를 바라보는 안목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경이 그런 면에서 중국 선불교의 분기점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고 간화선의 실천적인 입장에 사상적 바탕을 제공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스님의 말처럼 한국불교가 더 이상 물러섬이 없어야한다는 절박한 현실 앞에 종파주의는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없다. 서로를 인정하는 가운데 다시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하는 것이 우리 불교의 핵심인 간화선의 정체성과 대중화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활발발活潑潑’이란말로 대변되는 간화선의 실천적 요소들을 실참실구하는 수행자적 자세와 간화선이 너무 어려워 접근하기 어렵다는 일반적인 인식을 뒤바꿀만한 현실에 맞는 교수법 개발 등이 선행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월암 스님의 의지다.
스님의 불교 중흥에 대한 열망과 간화선 수행법에 대한 신념이 하루 빨리 보다 더 구체적으로 체계화되면서 우리의 불교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진정한 행복선으로 자리잡기를 기대해 본다.
취재·글 박경희
사진 우영철